[취재일기] 정치바람 타는 한·미 FTA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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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27일 제주에서 열린 지역유지들과의 정책 간담회에서 정동영 의장 등 열린우리당 지도부는 5월 지방선거를 염두에 둔 듯 제주 특산품인 감귤에 대한 각종 지원 방안을 쏟아냈다. 마치 1990년대 초반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당시 "대통령직을 걸고 쌀을 지키겠다"던 '호언장담'을 다시 보는 듯한 느낌이다.

5월 1차 협상을 앞둔 한.미 FTA가 벌써 정치 바람에 휘말리고 있다. 각종 이익단체를 겨냥한 선심성 공약이 정치권에서 남발되고 있다. 정치권이 나서서 이것저것을 지키겠다고 약속부터 하고 있는 것이다. 상대가 있는 협상에서 우리의 복잡한 속사정만 먼저 보여주는 모습이다. 2002년 타결된 칠레와의 FTA 협상 때도 정부는 정치권의 거센 압력 등으로 영.호남권의 대표적 과실류인 사과.배를 협상 품목에서 제외하기로 했었다. 당시 우리의 사정을 알아챈 칠레 측이 그렇다면 한국산 냉장고와 세탁기도 함께 제외하자고 나와 결국 이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정치권의 약속 남발로 국민의 기대수준만 높여 놓고 정작 협상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할 때 나타날 후유증도 걱정되는 대목이다.

정부의 과도한 침묵도 문제다. 정부는 2월 한.미 FTA 협상 개시 선언 이후 구체적인 협상 계획을 밝히라는 농업계.영화계 등의 요구에 대해 아무런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협상 전에 전략이 노출되면 우리에게 불리하다는 이유를 들어 각 산업 분야에 대한 협상안 초안을 아예 공개하지 않고 있다. 당초 2월 말까지 발표하겠다던 법률.의료 등 10개 서비스 분야 시장개방 계획도 협상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며 발표 자체를 연기해 버렸다.

한.미 FTA 협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국과의 협상보다 우리 내부에서의 의사 수렴과 조정 과정이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정부나 국회 차원의 공청회 한번 제대로 열리지 않았다. 여론을 어떻게 모으고 각종 이해집단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지에 대한 계획이나 논의는 없는 채 정치권은 약속을 남발하고 정부는 입을 꼭 닫고만 있다. 정부와 여당이 한.미 FTA의 대(對)국민 전략을 갖고나 있는 것인지 정말 궁금하다.

홍병기 경제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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