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인의이것이논술이다] 준비 안 된 토론은 오히려 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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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에서 방송되는 토론 프로그램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대부분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다. 주장의 요점이 불분명하고, 논거도 부실하며, 남의 의견을 잘 듣지 않고, 감정적으로 소리를 지르는 등 토론자들의 수준이 저급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시정잡배의 말싸움도 저것보단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전문가 토론이 이럴진대 학생들은 좀 나을까? 현장의 경험으로 보건대 전혀 나을 바가 없다.

김재인 유웨이중앙교육 오케이로직논술 대표강사

우선 토론 참가자들의 자질 부족을 들 수 있다. 전문가 TV 토론에서는 각종 이해관계가 토론을 망치는 주범이지만, 학생 토론에서는 대개 학생들의 지식과 소양 부족이 토론을 망치는 주범이다. 농담 삼아 '자갈을 모은다고 바위가 되는 건 아니고, 자갈밭이 될 뿐'이라는 얘기를 하는데, 학생 토론의 문제점은 딱 이 지점에 있다. 자기가 아는 한도에서 말을 할 수밖에 없는데, 아는 것이 일천하니 논의가 뱅뱅 돌거나 발언이 한두 사람에게 독점된다. 이것이 적절한 자극이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 타성에 젖어 말하는 사람만 계속해서 말하는 정체 현상이 벌어지고 만다.

바람직한 토론 조건이 무엇인지는 하나의 논술 주제이기도 한데, 가장 중요한 조건은 사안에 대한 정확하고 깊은 지식을 갖추었느냐 여부이다. 학생이라고 해서 이런 지식을 갖추지 못했다고 단언하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지만, 학생이 이런 지식을 갖추고서 토론에 참가하는 경우는 상당히 드물다. 특히 독서 토론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토론의 경우, 선정되는 책의 수준도 만만치 않게 어려울뿐더러 사회자마저 토론 진행에 필요한 만큼 책의 내용을 숙지했는지도 의심스럽다.

토론의 실상을 모른 채 원론적으로 '토론 수업이 좋다'고 외친들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먼저 토론에 참여할 자격과 자질을 배양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착실하고 꼼꼼한 지식 습득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각 교과목의 내용이나 시사적 사안에 대한 정확한 인지와 이해가 필요하며, 그에 대해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갖는 것도 필요하다. 독서 토론을 놓고 말하자면, 선정된 책에 나오는 어휘부터 정확히 이해해야 하고 정해진 시간 안에 내용 파악이 될 정도의 분량을 다루어야 한다. 이런 현실적 조건을 어긴 토론 수업은 말짱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 거듭 강조하지만 입시라는 것은, 또한 삶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인데, 시간의 경제이다. 정해진 시간 안에 어떻게 투자하고 결과를 끌어내느냐가 관건이다. 긴 안목으로 보면 준비된 토론은 아주 좋은 교육 방식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런 토론이 흔치 않기 때문에 토론을 위험하다고 하는 것이다. 차라리 그 시간에 다른 것을 하라. 각각의 사안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습득하고, 전문적인 의견들을 들어 보라. 그리고 생각하라. 토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얻게 될 것이다. 저급한 의견을 많이 듣는 것보다는 고급한 의견을 두어 개 듣는 것이 항상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법이다.

김재인 유웨이 중앙교육 오케이로직 논술 대표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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