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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는 권력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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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세계 제1 언어로서의 영어의 지위가 쇠퇴하고 있다는 최근 영국문화협회의 보고서가 그 첫째다. 영어를 모국어 내지 제1 언어로 사용하는 인구는 3억800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숫자로 보면 중국어와 힌두어, 아마도 스페인어보다 뒤지는 세계 4위다. 따라서 영어 하나만 알고 외국어를 하나도 못하는 영국인들은 글로벌 비즈니스에서 쓸모가 적고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프랑스의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는 지난 겨울 글로벌언어는 미국 헤게모니 냄새가 덜 나는 언어로 대체하자면서 프랑스어는 물론 스페인어.중국어 등의 대안 가능성을 탐색하는 특집까지 꾸몄었다.

정작 영어의 자존심을 짓밟는 실질적인 조치는 미국에서 나왔다. 미 상원 외무위원회는 중국어 학습을 국가안보 문제로 간주하고 공립고교에 13억 달러를 배정해 2015년까지 미국 고교생의 5%를 중국어로 무장토록 한 것이다. 글로벌 언어전쟁을 연상케 한다.

영어는 과연 쇠퇴하는가. 일생을 '영어장벽'에 갇혀 살고, 조기유학에다 연 10조원의 사교육비에 허리가 휘는 우리 입장에서 얼마간 위안이 될 법하다. 그러나 현실은 그 반대다. 영어 원어민 비중은 크지 않지만 영어를 두 번째 언어로 삼는 인구 10억여 명을 합치면 영어는 여전히 세계 제1의 언어다. 자국 언어에 자존심이 강한 프랑스인들도 독일에 여행 가면 택시기사에게 영어로 말한다. 최근 독일 30, 40대 부모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71%가 국제무대에서 자녀들의 성공을 위해 반드시 영어를 가르쳐야 한다고 답했다.

영어의 지배력은 대영제국과 전후 미국 지배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전 200여 년 동안 과학논문의 상당수는 독일어와 프랑스어로 쓰였다. 1920년대만 해도 양자역학 연구에는 독일어가 필수적이었다. 언어의 지배력은 과학기술의 지도력과 직결되고, 기술혁신과 정보혁명이 영어로 주도되는 한 영어의 지배력은 쇠퇴하지 않는다. 2050년까지 중국이 세계 제일의 경제대국이 된다 해도 평균적 중국인의 구매력은 선진국의 절반에도 못 미칠 전망이다. 빌리 브란트는 "내가 물건을 팔 때는 상대방 언어로 말해야 유리하지만 내가 살 때는 독일어로 말하겠다"는 명언을 남겼다. 미국 고교생에게 중국어를 가르치는 것보다 차라리 수학공부를 더 시키는 것이 국익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영어의 지배력을 미국의 헤게모니와 문화 지배로 받아들이는 것은 단견이다. 라틴어는 로마제국이 멸망하고도 살아남았다. '영어 강국' 인도와 파키스탄은 물론이고, 중국의 영어학습 인구도 1억1000만 명을 헤아린다. 설령 언어로서 이점이 적다 해도 남들이 다투어 사용하면 이는 표준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뜻에서 영어는 권력이다.

우리의 영어교육은 고비용 저효율의 한 상징이다. 토익의 고득점과 영어 구사력은 별개다. 한국 공무원의 대부분이 영어로 의사소통이 잘 안 되고 문서작성도 못해 업무에 지장이 있다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당국자의 지적이 우리의 영어 현실을 그대로 웅변한다. 글로벌 한국의 갈 길이 그만큼 멀다는 얘기다.

변상근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