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세 '왕언니 비서'… 딸도 동료직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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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그룹 수석비서 전성희 이사(오른쪽)가 같은 회사에서 근무하는 딸 심소담 계장과 직장생활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오종택 기자

국내에선 드물게 한 회사에서 근무하는 모녀가 있다. 대성그룹 김영대 회장의 수석비서인 전성희 이사(63)와 건설부문 심소담(34) 계장이 주인공이다. 심 계장이 지난해 9월 이 회사 설계담당 경력직으로 입사하면서 7개월째 모녀가 한솥밥을 먹고 있다.

전 이사는 국내 최고령 비서로 유명하다. 그는 37세 때인 1979년 대성그룹과 인연을 맺었다. 교환교수로 나간 남편(고 심재룡 서울대 철학과 교수)을 따라 캐나다에 있었던 2년을 빼고 꼬박 25년간 김 회장을 모셨다. 김 회장 눈빛만 봐도 오늘 할 일이 뭔지 알 정도가 됐단다.

그의 입사는 우연히 이뤄졌다. 이대 약대를 졸업한 뒤 인천 인성여고 교사를 하던 그는 남편 유학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 10년간 하와이에서 살았다. 1979년 귀국했지만 대학 시간강사로 일하던 남편의 월급만으론 생계가 막막했다. 대학병원에 취직하려는데 남편 친구인 김 회장이 비서로 일해달라는 제안을 해 왔다. 약사 월급보다 좀 더 주겠다는 얘기에 선택한 길이 평생 직업이 된 것이다.

그는 '비서계의 대모'나 '왕언니 비서'로 불린다. 비서를 오래했다는 이유에서만은 아니다. 손님 응대나 전화 연락 등 흔히 생각하는 비서의 역할을 뛰어넘어 김 회장의 일급 참모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89년 독일 헨켈사가 국내 합작선을 찾고 있을 때 전 이사는 회사 대표로 독일에 가 교육을 받고 조사보고서를 작성해 협상을 성사시켰다. 김 회장이 쓰는 영문 편지를 손보고, 구상 단계인 사업의 진행 상황을 수시로 점검하는 것도 그의 몫이다.

하지만 '비서는 비서여야 한다'는 게 전 이사의 철칙이다. 그는 "들어도 안 들은 척, 알아도 모른 척, 봐도 못 본 척하고 인사 관련 얘기는 절대 회장에게 말하지 않는다"며 "CEO가 안정된 상태에서 최선의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드는 게 비서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이 같은 직업관은 그가 손님들에게 내놓는 커피 한잔에도 담겨 있다. 그는 찾아온 손님마다 커피에 크림과 설탕을 얼마나 넣는지 일일이 메모한다. 다시 방문한 손님은 알아서 내오는 커피 맛에 감탄하게 마련이다.

전 이사의 이런 면은 딸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심 계장은 이대 1학년을 마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일리노이대에서 건축을 전공했다. 졸업 뒤 미국에서 설계사로 일하면서 다양한 건축물을 짓는 데 참여했다. 부친 병세가 나빠진 2004년 귀국해 국내 설계사무소에서 일하다 전 이사 권유로 대성그룹 문을 두드렸다. "어머니가 다니던 회사여서 어릴 때부터 좋아 보였다"는 게 지원 동기다.

하지만 그는 이력서나 자기소개서에 전 이사 얘기를 한 줄도 넣지 않았다. '공사(公私)를 구분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회사에선 아는 척도 안 하지만 밖에선 서로 많은 배려를 한다. 서울 신림동 집에 같이 사는 두 사람은 출퇴근을 같이 한다. 아침엔 전 이사의 출근 시간에 맞춰 심 계장이 일찍 나가고, 저녁엔 전 이사가 심 계장을 한시간 가량 기다려 늦게 퇴근한다. 전 이사는 심 계장에 대해 "집에선 효심 깊은 딸이고 밖에선 똑소리 나는 신세대 직장인"이라며 "너무 늦지 않게 배필을 찾았으면 하는 게 유일한 바람"이라고 말했다.

나현철 기자 <tigerace@joongang.co.kr>
사진=오종택 기자 <jongta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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