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상 사의냐 시간벌기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3면

이강진 총리 공보수석은 기자들의 질문에 "골프는 총리가 개인적으로 한 일이다. 우리가 총리의 비공식적인 일정을 어떻게 아느냐"고 일축했다. 이 총리는 3일 예정된 일정에 따라 전남 여수와 곡성을 방문했다. 지역 현안 보고를 받고 주민들과 간담회를 여는 민생 순방이다. 이 자리에서 지방대 총장 한 명이 "여수에 한의대를 유치해 달라"고 요청하자 이 총리는 "여기서 할 얘기가 아니다"라고 면박을 줬다.

여유만만하고 자신감에 차 있던 총리실의 분위기는 4일 오전부터 돌변했다. 골프 동반자 가운데 불법 정치자금을 건네 사법처리를 받았던 기업인이 여럿 포함된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 총리는 주말 동안 두문불출하고 삼청동 총리 공관을 떠나지 않았다. 총리실 관계자는 "총리가 하루종일 자료 검토만 했다"고 전했다.

5일 오전 8시, 이 총리는 이강진 공보수석을 공관으로 불러 입장을 밝혔다. 오전 9시45분 기자실로 돌아와 총리의 구술을 전하는 이 공보수석은 상기되고 곤혹스러운 표정이었다. 여유는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려웠다. 내용은 더했다. '사려깊지 못한 처신'에 대해 국민에게 사과하고 노무현 대통령의 해외순방이 끝나는 대로 거취 문제를 말씀드리겠다고 했다. 이 수석은 "총리의 구술(口述)이 있었고 (나는) 이에 대한 질문에 답할 입장이 아니다"면서 짧은 발표만 하고 아무런 설명 없이 총리실을 떠났다. 이후 휴대전화도 꺼놓은 채 언론과의 접촉을 피했다. 정확한 표현은 없었지만 그간의 행동과 180도 다른 모습에 견줘 사실상 사의 표명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시간 벌기용 발언이 아니냐"는 해석도 만만치 않게 나왔다. 거취 표명을 대통령 순방 이후로 미뤄 일단 소나기는 피한 뒤 여론이 잠잠해지면 대통령이 사임을 만류하는 것으로 일단락지으려 한다는 시나리오다.

대국민 사과를 직접 하지 않고 공보수석에게 '구술'해준 대목도 이런 관측을 증폭시키고 있다. 총리실은 당초 3.1절 골프가 총리의 개인행사에 불과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날 해명에는 개인 행사에 대해 왜 대국민 사과를 하는 건지에 대한 설명도 없었다.

총리실은 현재 비서실장 자리가 공석이다. 이기우 전 총리 비서실장이 교육인적자원부 차관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이 차관 역시 3.1절 골프 회동에 참가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골프를 치러 내려간 과정에 대해서는 이 차관 측의 해명이 오락가락하고 있다. 이 차관도 외부와의 연락을 끊은 상태다.

최현철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