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건강철학<3>이시형<고려병원·신경정신과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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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위암. 그에겐 청천병력이었다. 위장병으로 오래 고생해오긴 했지만 혹시나 했던게 사실로 드러나고보니 기가 찰 일이었다. 환자 자신이 이름난 외과의사라 숨길수도 없었다. 수술준비를 하는 며칠사이 그는 아주 딴 사람으로 되어가고 있었다.
의사이기에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말이 없어졌다. 면회도 사절이었다. 깊은 고뇌와 함께 심각한 우울증에 빠진 것이다.
이윽고 수술. 한데 이 무슨 신의 은총인가. 그건 암이 아니었다. 만성위염으로 판명된 것이다. 수술후 회복도 물론 빨랐다. 저승갔다 돌아온 사람의 심경이야 새삼 설명이 필요 없다. 가족은 물론이고 그를 아끼는 모든 사람들도 재회의 기쁨에 들떠있었다.
한데도 이상할이만큼 그의 표정은 무거워 보였다. 평소 명랑했던 그의 성품은 살아나지 않았다.
우리가 그를 골프장에 데려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즐기던 골프도 시큰둥한 모양이었다. 평소의 그를 아는 나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었다. 함부로 농담을 걸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모두들 눈치만 살피며 조심스러워했다.
골프장에서 우리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그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저만큼 혼자서 먼 산을 쳐다보며 무언가 사색에 잠긴 듯 하였다. 한참을 그러고 섰더니 슬슬 신발을 벗기 시작했다. 맨발로 잔디를 밟고 선게 궁금해 물었다. 『왜 그래?』 그 말엔 대꾸도 없이 한참 태양을 정면으로 쳐다보더니 이윽고 말문을 열었다.
『살아있다는게 이런거로군. 내 발로 대지를 딛고서 태양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 이것말고 또 무엇을 탐한단 말인가.』 그는 자기 말을 확인하려는 듯 조심스레 몇발짝 잔디를 밟았다.
나는 그 순간만큼 한 인간의 진한 감동을 목격한 적은 일찌기 없었다. 나는 다시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아주 다른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옛날의 그가 전혀 아니었다. 솔직이 그의 원래 성품은 좀 가벼운 편이었다. 머리좋은 사람이 대개 그렇지만 그 역시 경솔한 듯한 면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앓고 난 후의 그는 아주 사람이 달라졌다. 도사나 된듯 했다. 진지하고 겸손해졌다. 모든 면에서 침착하고 여유가 있어 보였다.
중후한 맛이 풍긴다. 과묵한 속에 어쩌다 던지는 말은 철학적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인생을 보는 눈도 달라진 것 같다. 넓고 깊었다.
세상에 사람이 변해도 어찌 이렇게 변할수 있단 말인가. 10년을 입산수도한데도 이렇게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이건 완전한 변신이다.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난 것이다. 정말 반가운 일이다.
앓는다는건 참으로 기분좋은 일이다. 가벼운 몸살도 앓고 난 후엔 상쾌하다.
한 며칠 호된 몸살을 앓고 난 후의 첫 외출, 눈부신 태양이 가벼운 현기증을 일으킨다. 아직 다리가 후들거리긴 하지만 마음은 하늘을 날듯이 가볍다. 그 상쾌함이라니! 살아있는 생동감이, 삶에의 희열이 온몸에 넘친다.
하물며 중병을 앓고 난 다음이랴. 새로 태어난 자신의 모습에 짐짓 놀랄 것이다.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하다. 무한한 감사와 기쁨에 넘칠 것이다. 이 소중한 삶을 아무렇게나 살아버릴순 없다. 순간 순간을 아쉽게, 열심히 살아갈 것이다.
살아 숨쉬는 한 불평은 하지 않을 것이다. 어느 한순간을 헛되이 할수 없는 절실함이 가슴에 와 닿을 것이다.
앓는다는건 참으로 값진 체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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