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광저우청사 건물 79년만에 확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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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때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다섯번째로 썼던(1938년 7월22일~9월19일) 중국 광저우(廣州) 청사의 위치가 79년 만에 처음으로 확인됐다.

없어진 줄 알았는데 건재...주거용 건물로 사용중 #주광저우 총영사관-광저우시 문화국 공동조사로 확인 #1938년 두달 간 사용...김구 선생 백범일지에도 등장

주광저우 총영사관은 28일 “광저우 임시정부 청사 건물에 대해 학계에선 이미 없어졌다는 주장이 많았고 언론 보도도 마찬가지였지만, 광저우시 문화국과 협조해 재차 확인하는 과정에서 해당 건물이 현존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됐다”고 밝혔다.

임시정부 광저우 청사 [사진 외교부]

임시정부 광저우 청사 [사진 외교부]

총영사관은 그 간 청사 위치 확인을 위해 관련 각종 사료와 문헌 자료를 광저우시 문화국 측에 제공했다. 문화국은 지난해 1월 임시정부 청사 주소인 광저우시 동산구 휼고원로 35호 ‘동산백원’의 현 주소가 휼고원로 12호이며, 해당 건물이 아직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임시정부가 1938년 사용했던 광저우 청사의 현재 모습. [사진 외교부]

임시정부가 1938년 사용했던 광저우 청사의 현재 모습. [사진 외교부]

이후 총영사관과 문화국은 공동으로 1920~30년대에 제작된 광저우시의 옛지도를 분석했다. 임시정부보다 10년 앞서 동산백원을 사용했던 연구소 관련 영상 자료까지 입수해 현재 건물과 모습을 비교하기도 했다.

공동조사결과를 바탕으로 독립기념관 국외사적지팀은 전문가 고증 등 검증 작업을 진행, 지난해 9월 최종보고서를 완료했다. 이를 토대로 국가보훈처 등 유관기관 관계자들이 지난해 12월 현장 답사를 마쳤고, 최종적으로 이 건물이 임시정부의 광저우 청사가 맞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 건물은 현재는 주거용으로 사용되고 있다.

임시정부 광저우 청사 [사진 외교부]

임시정부 광저우 청사 [사진 외교부]

1919년 4월 상하이에 수립된 임시정부는 45년 광복 뒤 국내로 환국할 때까지 항저우(杭州), 젼장(鎭江), 챵샤(長沙), 광저우(廣州), 포샨(佛山),류저우(柳州), 충칭(重慶) 순으로 청사를 옮겼다. 임시정부가 광저우 청사를 쓴 1938년은 중일전쟁이 격화하던 시기였다. 국민당 정부의 수도 남경이 함락되자 임정은 호남성(湖南省) 챵샤(長沙)로 이동했지만 전황이 급박해지며 7월 19일 새벽 다시 챵샤를 떠나 7월22일 광저우에 둥지를 틀었다.

짧은 기간이지만 당시 임시정부의 기록은 또렷이 남아 있다.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에 이렇게 적었다. “대가족 일행보다 하루 먼저 출발하여 광주에 도착하였다. 이전부터 중국 군사 방면에 복무하던 이준식, 채원개 두 사람의 주선으로 동산백원을 임시정부 청사로 하고 아세아 여관에 대가족 전부를 수용하였다.(중략)광주에서 적기 공습이 심하여 대가족과 어머님을 불산으로 이주시켰다. 광주에서 2개월 간 머물렀다.”

독립운동가 부부였던 양우조와 최선화는 육아일기인 ‘제시의 일기’에서 “믿었던 중국군이 일본군에게 연신 대패하며 뒤로 밀렸고, 광동성의 수도 광주의 동산백원에 정착했던 임시정부는 다시 피난을 결정한 것이다”라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광저우 총영사관은 “임시정부의 광저우 청사 확인은 그 간 공백으로 남아 있던 중국 화남지역에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항일 투쟁 역사를 재조명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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