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 밸리 한인 1세대가 얘기하는 실리콘밸리의 강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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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실리콘밸리 한인 1세대로 꼽히는 ‘유비모스 테크놀로지스’ 주동혁 대표는 “‘실패를 인정하는 문화’와 ‘다름을 인정하는 다양성’이 실리콘밸리 혁신의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실리콘밸리=손해용 기자

미국 실리콘밸리 한인 1세대로 꼽히는 ‘유비모스 테크놀로지스’ 주동혁 대표는 “‘실패를 인정하는 문화’와 ‘다름을 인정하는 다양성’이 실리콘밸리 혁신의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실리콘밸리=손해용 기자

1976년 대학원을 갓 졸업한 20대 중반의 젊은이는 미국 캘리포니아 서니베일에 있던 반도체 회사 ICII로 연수를 떠났다. 1년 간 차곡차곡 반도체 설계 기술을 익힌 그는 귀국해 한국반도체(삼성전자의 전신)에서 손목시계용ㆍ전자오븐용 칩 등을 개발하는 데 일조했다. 한국이 반도체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기틀이 된 기술이다.

그로부터 40년 후 그는 미국 새너제이에 위치한 반도체 기술 기업을 운영하며 실리콘밸리를 누비고 있다. 실리콘밸리 한인 1세대로 꼽히는 ‘유비모스 테크놀로지스’ 주동혁(64) 대표의 이야기다.

주 대표는 최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실리콘밸리를 움직이는 에너지는 강력한 도전정신과 창업하기 좋은 환경”이라고 말했다.

1980년 한국반도체를 퇴사하고 유학길에 오른 그는 84년 미국 미네소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AMD에서 일하기 시작하며 실리콘밸리에 터를 잡았다. 90년대 초반 메모리 반도체 개발을 위해 귀국해 LG 반도체에서 4년간 개발담당 임원으로 일한 것을 제외하면 약 30년 간을 실리콘밸리에서 일했다.

주 대표는 “90년대 초반만 해도 실리콘밸리 주요 기업에 진출한 한국인 직원은 손에 꼽을 정도로 수가 많지 않았다”며 “그러나 한국이 반도체ㆍ스마트폰에서 세계 최고로 발돋움한 지금은 한국인이 없는 기업을 찾기 힘들 정도로 위상이 올라갔다”며 뿌듯해했다.

그는 실리콘밸리가 10년 주기로 인류에게 다른 세상을 열어줬다고 했다. 1970년대 반도체, 1980년대 PC, 1990년대 인터넷, 2000년대 스마트폰, 2010년 무인자동차 같은 융합산업 등이 모두 실리콘밸리에서 잉태되고 전 세계로 확산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실리콘밸리를 세계 혁신의 진원지로 자리잡게 했을까? 그는 ‘실패를 인정하는 문화’가 실리콘밸리의 DNA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이는 과거 미국인들이 캘리포니아로 황금ㆍ석유를 찾아 나선 서부 개척자 정신이 구현된 것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첨단기술 개발에는 모험을 선택하는 도전 정신이 필요한데, 여기서 도전 정신이란 치밀한 계획과 철저한 준비를 거친 계산된 위험을 뜻한다”며 “준비를 거친 계산된 위험이므로 실리콘밸리에서는 실패하더라도 실패자로 낙인찍지는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런 환경이 자리잡다 보니 전 세계 역량있는 과학 기술자들, 시장을 읽을 줄 아는 벤처 투자가들이 몰려든다. 이는 실리콘밸리의 혁신 생태계를 발전시키고 다시 인재ㆍ기업ㆍ돈이 실리콘밸리로 모여드는 선순환이 이어지고 있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다양성도 실리콘밸리의 혁신을 낳은 모태다. 실리콘밸리 전체 인구 중 외국 출생자 비율은 약 3분의 1에 달한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관용의 문화에서 색다른 아이디어가 싹트고, 다양한 피부색의 사람들이 국경을 넘나들며 시너지를 낸다. 격의 없는 소통과 업무 처리, 빠른 의사결정 구조 역시 또 다른 성공 코드다.

실리콘밸리의 문화를 아무나 모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실리콘밸리는 글로벌 정보기술(IT) 패러다임을 주도하고 있는 미국에 위치해 있다. 첨단 기술의 ‘테스트베드’이자 내수가 곧 글로벌이 되는 시장은 실리콘밸리가 유일하다.

주 대표는 “날씨ㆍ문화ㆍ인재ㆍ자본ㆍ기술 등 혁신을 위한 최적의 조건을 갖춘 곳은 미국 내에서도 실리콘밸리 밖에 없다”며 “한국이 무작정 실리콘밸리 따라하기에 나서기보다는 우리에게 필요한 요소를 선택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물론 성공이 쉽지 않겠지만 시행 착오를 지렛대 삼아 언제든지 다시 도전할 수 있는 곳이 실리콘밸리”라며 “한국의 젊은이들이 세계를 무대로 날고 싶다면 실리콘밸리에 과감히 진출하라”고 주문했다.

새너제이(미국)=손해용 기자 sohn.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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