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동포 이간지『삼천리』 아쉬움속 13년만에 종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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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동경=최철주특파원】재일동포 지식인들이 12년넘게 일문으로 발행해온 이간지 『삼천리』가 18일 50호로 종간됐다.
재일한국인의 역사적 존재를 일본에 인식시키고 그의 굴절된 현실을 증언해온 삼천리는 최종호에서 다시 한번 「재일문제」를 특집으로 다루면서 문을 닫았다. 한일간의 문제를 가장 설득력있게 분석해온 삼천리의 종간은 이를 애독해온 일본 사학자나 문학자에게도 적지않게 서운한 감정을 남겼다.
삼천리는 재일동포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온 사학자 강재언·이진희씨, 작가 김달수씨의 주도로 75년에 창간되었다.
이들은 70년을 전후해서 조총련등 좌경단체나 학교와의 인연을 끊고 삼천리를 통해 일본의 왜곡된 대한권을 시정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조총련은 끊임없는 방해책동으로 3인을 괴롭혔으며 마지막에는 이들의 여자관계등 비행을 들춰내라는 비밀지령을 산하조직에까지 내렸다.
사학자 이진희씨는 『우리는 삼천리의 품격을 계몽적이라기 보다는 일본 저널리즘의 최고 수준에서 유지하고 논쟁적인 차원에서 이끌어갔기 때문에 독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고 회고했다. 삼천리는 지금까지 책이외의 광고는 싣지않았다.
삼천리가 중점적으로 취급해온 주제는 재일한국인 문제이외에 일본속의 한국문화·조선통신사의 발자취등이 있으며 이것은 이미 26권의 단행본으로 발행되어 한국관계의 필독서로 알려질만큼 유명해졌다. 특히 79년에는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현실을 속속들이 파헤쳐 82년 한일간의 정치문제로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역사학자 강재언씨는 삼천리의 발행이 사실상 언론투쟁의 역사라고 회고했다.
『김일성의 역사가 날조라는 것을 아무도 말못했지요. 보복과 모략이 무서웠으니까요. 그러나 삼천리는 공개적으로 이것을 활자화했습니다.
우리는 조총련의 집단적·조직적 압력에 항거해서 표현의 자유를 향유했습니다. 삼천리는 바로 이의 산물이었습니다. 정열과 만용으로 일해왔었지요.』
40대 후반에서 삼천리에 손을 댔던 3인은 이제 반백의 60대 노년에 접어들었다. 이들이 종간을 서두르게된데 대해 작가 김달수씨는 『재정적인 문제등도 있으나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삼천리를 바통 터치해서 끌고나갈 우리 젊은이들이 없다는데 있다. 가슴아픈 일이다. 발굴하려고 노력했으나 헛일이었다』고 말했다. 3인은 재일동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있는 2∼3세의 사고와 감각을 자신들이 다 흡수할수 없는 안타까움 때문에 50호에서 종간을 고하지 않을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삼천리를 꼬박 구독해온 일본 저명작가인 「시바·료타로」(사마요태랑)씨는 종간에 즈음한 기고에서 『삼천리만큼 동지적으로 결합한 그룹은 매우 적다. 지금 생각하면 이들은 현재에 봉사하기 보다 후세라는 아직 오지않은 역사에 계속 봉사해온 듯하다. 이런 잡지가 이 세상에 많이있을 턱이 없다』고 애석해했다.
조선사연구회 회장인 「하타다」(기전외)씨는 『고대 한일관계사의 잘못된 부분을 시정시키고 일본의 한국이해를 바로잡는 삼천리의 장년에 걸친 노력에 머리숙인다』고 말했다.
삼천리의 평균 발행부수는 1만부. 이잡지의 12년이 넘는 수명은 재일동포 서채원씨의 헌식적인 재정지원으로 연명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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