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고 늘고, 셰일 치받고…박스에 갇힌 유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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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스러운 트렌드(worrisome trend).”

한달 새 17%↓ 40달러대 초반
모건스탠리 “30달러권 재진입”
OPEC 산유량 최고치 유지
50달러 되면 셰일 원유 증산
저유가 지속엔 전망 갈려

투자은행 모건스탠리가 25일(현지시간) 내놓은 보고서에서 진단한 미국 휘발유 재고 상황이다. 지난 주말 현재 휘발유 재고는 거의 1000만 배럴에 이른다. 최근 1년 새 가장 많은 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날 미국과 영국, 중동의 원유시장에서 국제유가가 2% 넘게 떨어졌다. 미국 서부텍사스유(WTI) 가격이 배럴당 43달러 선까지 밀렸다. 올 4월 25일 석 달 새 가장 낮다. 한국 휘발유 값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두바이산 원유 값은 41달러 선까지 낮아졌다. 하루 뒤인 26일 아시아 지역 온라인 거래에서 WTI 가격이 0.2% 정도 오르긴 했으나 전날 하락의 충격을 떨쳐버리진 못한 모양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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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슨로이터통신은 이날 전문가의 말을 빌려 “WTI 가격이 지난달 8일 52.31달러까지 회복한 뒤 한 달 보름 정도 사이에 17% 정도 하락했다”며 “이는 단기적으로 침체장에 빠질 가능성을 시사한다”고 했다. 월가 전문가들은 자산 가격이 20% 정도 떨어지면 침체 국면의 시작으로 본다. 미 정유회사들은 올해 휘발유 소비가 늘 것으로 봤다. 원유 가격이 떨어질 때마다 미리 정제해 놓았다. 하지만 이 예측이 어긋나면서 사달이 났다. 미 경제의 활력이 떨어지기 시작해서다. 게다가 휘발유 비수기인 휴가철도 겹쳤다.

모건스탠리는 “국제유가 조정 국면이 엄습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정유사의 원유 구매가 줄 게 분명해서다. 배럴당 30달러대 재진입도 가능하다는 예측이다.

30달러대 재진입은 월가로선 예상 밖의 일이다. 올 3월 골드먼삭스 등 투자은행들은 “갑작스러운 원유 재고 감소”를 경고했다. 당시 세계 원유 초과 공급분은 하루 250만 배럴 정도였다. 골드먼삭스는 “테러 여파로 나이지리아와 중동에서 생산 차질이 빚어져 이 초과분이 갑자기 사라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골드먼삭스 등의 경고는 원유시장의 뿌리 깊은 두려움을 자극했다. 바로 공급 쇼크(Supply Shock)다. 원유시장 참여자들은 1973년(1차 석유파동)과 79년(2차 석유파동), 91년(1차 걸프전)에 공급 쇼크를 경험했다. 그 충격은 어떤 변수보다 유가에 강한 영향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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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올해 생산 차질은 오래가지 못했다. 나이지리아 산유량이 올 1월 하루 200만 배럴에서 5월 140만 배럴로 30% 정도 급감했다. 하지만 지난달 이후 다시 생산량이 늘어나고 있다. 정부군의 반격으로 테러리스트 활동이 잦아들어서다. 톰슨로이터는 “이라크 등의 이슬람국가(IS) 거점이 정부군 등의 공격으로 무너지면서 원유 생산량이 다시 늘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 석유수출국기구(OPEC) 산유량은 올 6월 말 현재 하루 3280만 배럴 정도다. 사상 최고치인 지난해 말 3300만 배럴과 별 차이가 없다. 여기에다 ‘셰일 혁명’도 유가에 대한 압력을 키우고 있다.

원유가격이 배럴당 50달러 선에 이르자 미국의 셰일 원유 채굴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올 6월 이후 15% 정도 증가했다. 셰일 원유는 전통적인 원유 채굴보다 생산 중단과 재개를 빠르게 할 수 있다.

이렇게 “공급 차질이 빠르게 해소되고 미국 셰일 원유 채굴이 증가하는 와중에 미 휘발유 재고량이 급증해 국제유가의 발목을 잡고 있다.”(모건스탠리) 미 정유회사발 유가 하락인 셈이다.

그 바람에 몇몇 전문가가 예측했던 ‘국제유가 터널 현상’이 재연됐다. 미 투자자문가인 데니스 가트먼 등은 올 3~4월 “유가가 오르면 공급이 빠르게 늘어나는 구조가 형성됐다”며 “그 결과 배럴당 30~50달러 사이에서 오르내리는 터널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고 예상했다. 이는 90년대 저유가 시대 경험을 바탕으로 한 전망이었다. 당시 유가는 배럴당 20~40달러 선에서 상당 기간 오르내렸다. 원인은 달랐다.

그때는 OPEC 회원국의 생산 감축 합의 위반이 박스권 유가를 가져왔다. 그들은 유가가 오를 듯하면 쿼터를 어기고 생산량을 늘려 유가 하락을 자초했다.

이제 관심은 터널 현상이 얼마나 이어질까다. 90년대는 6년 정도 이어졌다. 요즘은 셰일 원유 공급의 탄력성 증가 등 터널 현상의 장기화를 가늠해볼 수 있는 요인이 여럿이다. 하지만 블룸버그는 “요즘 선진국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테러가 언제 산유국으로 번질지 알 수 없다”며 “공급 차질 때문에 터널 현상이 오래가지 못할 것으로 보는 전문가도 적지 않다”고 전했다.

강남규 기자 dism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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