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서울에선 순국선열합동추모대제전이 있었다.
상해 임시정부 때부터 지내온 추모대제는 벌써 66회 째를 맞았다.
그러나 이 제전의 실제 주관자인 순국선열 유족들은 광복 40년의 시점에서 적잖게 아쉬움과 괴로움을 느끼고 있다.
그것은 크게는 나라의 애국정신이 희미해지고 있다는 탄식이며, 작게는 정부와 국민의 무심이 지나치다는 호소다.
정부가 광복 후 나라를 위해 희생된 분들에겐 응분의 보상과 배려를 해왔으면서 『순국선열의 말없는 희생에 대해서는 어떤 보상도 없었다』는 주장도 한다.
추모대제에 모셔진 순국선열은 그 수가 분명하진 않다.
대체로 1895년 을미사건이래 광복 때까지 일본군에 학살된 이는 모두 포함된다고 한다. 그 수는 무려 16만2천여 명. 그러나 그 순국선열은 대개 절손이거나 살아남기 위해 숨어살아 유존한 가족은 불과 기천이다.
「순국」은 원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을 뜻한다. 그 전거는 『한서』에 나온다. 「항상 분투하여 몸을 돌보지 않고 목숨으로 나라의 위급을 지킨다 (상분부고신 이순국가지급)는 것이다.
그 말은 「순난」과도 통한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것은 「순도」다. 정의 또는 종교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이다. 『맹자』 에는 「천하무도 이신순도」라는 말도 있다. 그것은 「순사」 혹은 「순절」과도 통한다.
1905년 을사협약에 의해 나라를 일본에 빼앗겼을 때 목숨을 버린 순국의 의사들이 줄을 이었다.
11월 28일 전 참판 홍만식이 음독 자결하고 30일에 시종무관장 민영환이 자결했다. 12월 1일에 조병세와 이명재가 자결했고 6일에 평양 진위대 상등병 김봉학이 칼을 물고 자결했다. 30일엔 전 참판 송병선이 음독 자살하고 재상집 노비들 중에도 부엌칼로 목을 찔러 자살하는 이가 있었다.
순국의 선비들이 남긴 유언은 특히 대의가 무엇인가를 생각케 한다.
최익현은 대마도에서 절식으로 죽을 때 『아사하는 것은 극히 작은 일이다. 실절하는 것은 너무도 큰일이다』고 했다.
의병을 일으킨 후 잡혀 죽은 정환직의 사세시도 있다. 「몸이야 없어진들 굳은 마음만은 변할 수 없다. 의만이 중한 것이니 죽은들 어떠랴.」(신망심불변 의중사유경)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린 이들은 많다. 그들의 유덕을 기리는 것은 다만 형식과 허례일 수도 없다. 나라의 대의와 정도가 살아난다면 그것만이 순국의 보상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