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우리 미래를 함께 고민하는 정치인이 그립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8면

채인택
채인택 기자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기사 이미지

채인택
논설위원

4·13 총선이 끝난 지 1주일이 지났지만 여진은 끝이 없다. 1987년 9차개헌 이후 치러진 총선 중 가장 극적이었다는 평가다. 누구도 단독 과반을 차지하지 못한 결과는 절묘하다. 정치인은 교만해선 안 된다는 국민의 소리다.

하지만 선거 결과와 무관하게 나는 이번 총선 기간 내내 귀갓길이면 우울했다. 광역 버스에서 내려 마을버스로 갈아타는 정류장에 서면 우울은 극에 달했다. 절망과 분노가 교차했다. 정류장 건너편 빌딩 벽면을 가득 채운 초대형 현수막 때문이었다. 처음엔 한 정당의 예비후보 3명의 공약이 나란히 붙었다. 후보가 최종 결정된 뒤로는 1명의 현수막만 남았다. 문제는 이를 보고서 누가 떨어지고 붙었는지 짐작하기조차 쉽지 않았다는 점이다. 죄다 엇비슷했으니 말이다. 이른바 백화점식 나열 공약이다.

게다가 정류장에서 공약 현수막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면 국회의원이 아니고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로 착각할 정도였다. ‘국제중학교 유치’ ‘○○지구 개발’ ‘광역철도 유치’ 등 지역개발 공약 일색이었다. 기초 지자체 단체장이 내세울 수 있는 공약과 다른 점을 찾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지역 주민을 대표해 국정을 감시하고, 대한민국을 이끌고 나갈 법을 만들겠다는 국회의원 후보의 출사표는 도저히 아니었다. 정부의 세금 사용을 감시하겠다는 단호한 결의는커녕 자신이 더 많은 세금을 쓰겠다는 선심성 공약만 난무했다.

그보다 더 놀란 것은 장관을 지내고 총리까지 맡을 뻔했던 거물급 후보의 지역구에 내걸린 현수막이었다. 자동차로 그 지역을 지나다 본 현수막에는 ‘○○○역 유치’ 한마디가 적혀 있었다. 광역자치단체장을 지내고 앞으로 대선까지 넘볼 것이라는 평을 들었던 또 다른 후보의 지역구를 지나다 보니 ‘공영 주차장 유치’라는 현수막이 눈에 띄었다.

큰 자리를 지낸 분들이 이젠 지역 민원 해결에 앞장서며 주민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의미일까? 이게 지역 밀착형 정치일까?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그분들이 만일 그런 아름다운 봉사의 의도가 있었다면 기초 지자체 선거에 나서는 게 훨씬 어울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이내 들었다. 혹시나 이런 공약이 ‘나를 찍어 주면 정치적 힘을 바탕으로 예산을 끌어오겠다’는 성격의 거래 제안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이는 지역 예산으로 표를 사겠다는 매표 행위와 어떻게 다른 것일까? 지역 예산은 원래 누구의 돈인가? 내가 힘이 있으니 전국적인 균형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써도 되는 것일까? 의문이 끝없이 샘솟았다.

그뿐이 아니다. 유세장에서 정당 대표가 ‘지역이 낙후한 것은 계속 힘 없는 정당을 찍어서 그런 것’이라고 말해도 되는 것일까? 그간의 지역 낙후는 정치적 보복이었다는 이야기인가? 열세 지역에서 우리 후보를 뽑아 주면 예산 폭탄을 터뜨리겠다는 정당 대표는 국회의원이 무엇을 하는 자리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지역구 예산을 차지하기 위해 국회에 보내는 밀사라고 여기는 것일까?

물론 동네 사람들에게 김밥 한 줄 대접하지 못하는 엄격한 선거법을 지켜 가며 표를 얻으려다 보니 이런 지역 민원 해결형 공약을 내세웠을 수도 있다. 하지만 국민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국회의원 후보들은 주민들의 표만 바라보고 공약을 내걸었는지 몰라도 주민들은 대한민국을 생각하며 투표했다. 이는 선거 결과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매표성 지역 공약이 난무하고 이미지 정치만 활개친 정치 상황이 국민의 심판을 받은 이유다.

아쉬운 것은 이번 총선에서 과학기술 발전과 이를 통한 기업과 벤처 활성화, 국민 안전화, 자주국방 등 우리 공동체의 미래를 위한 구체적인 공약을 내세운 후보를 찾기가 힘들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정당 공약도 국회의원 공약과 차이가 없을 정도로 개발 공약으로 가득했다. 게다가 보험 약관이나 의약품 설명서처럼 깨알같이 ‘작은’ 내용 투성이였다. 선거가 끝난 지금 무슨 공약이 우리의 가슴을 울렸는지 기억하기조차 쉽지 않다. 눈앞의 선거 대신 우리 공동체의 미래를 고민하며 정책을 개발하는 통 큰 정치,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정직한 정치인이 그립다. 수입해 올 수도 없고.

채인택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