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公人에게도 인권은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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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20여년 전 미국에서 잠시 공부하는 동안 인권 존중에 대한 신선한 경험을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박사 과정을 이수 중인 사람들이 학위 논문에 필요한 설문조사를 실시하기에 앞서 대학 인권위원회를 통해 설문 대상이 될 학생들의 인권침해 유무에 대한 확인 절차를 거치는 것을 보고 역시 미국은 인권에 관한 한 매우 철저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얼마 전 우리나라 인권위원회에서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이 학생과 학부모의 프라이버시 침해 가능성이 있다는 결정을 한 것을 보면서 그 결정의 당부(當否)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우리나라도 인권에 대한 인식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생각이다.

인권은 본질적으로 개인이 국가에 대해 주장할 수 있는 공권(公權)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로 국가기관의 개인에 대한 인권침해가 문제가 되지만 오늘날은 사인(私人)간의 인권침해도 주요 이슈로 다뤄진다.

최근에는 각종 사회집단, 또는 주민들에 의해 공권력이 위협받고 기업이나 공공기관의 장, 또는 그 구성원에 대한 인권침해적 행태가 적지 않게 목격되고 있다.

따라서 이제는 공인(公人:public figure)에 대한 인권도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시점이 됐다.

어떤 사안에 대해 집단이나 개인이 공공기관의 기관장이나 기업의 대표 또는 그 조직 자체에 대해 공격적 언동으로 기선을 제압해 결국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해 보겠다는 의도는 다분히 전략적 측면에 의한 행동으로 이해할 만하다.

다만 이것이 도를 넘어 근거 없는 인신 비방과 모욕적 언사로 본래의 주장과 관계없는 측면의 갈등을 증폭시키면서까지 여론을 유리한 쪽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 시위의 보편적 형태로 되고 있는 점이 우려되는 것이다.

물론 공인의 직무에 대한 비판이나 사생활 공개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것이 인권 선진국의 추세라는 점과, 어떤 조직이든 그 조직의 장은 눈과 자세를 낮춰 주민이나 구성원들의 작은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된다는 당위성을 고려할 때 비이성적이고 불합리한 행동이라 해서 그때마다 공직자가 일일이 대응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대통령 또는 사회 저명인사의 말이나 행동을 희화화한 만화나 TV 프로그램이 일상화된 것도 그와 같은 흐름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독일.영국 등 인권 선진국에서도 정책 비판과 인격모독, 풍자와 명예훼손은 엄격히 구분하고 있다. 진정한 표현의 자유는 합리적 주장이 정당한 방법으로 표출되고, 상호 간에 인격이 존중되는 가운데 보장돼야 하며 법과 상식의 테두리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취지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힘으로 억누르는 것이 용인돼서는 안 되는 것처럼 약자라는 이유만으로 불법적 행위까지 정당화하려는 행태도 지양돼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의 공고화를 지향하는 이 시점에서 뭐든지 힘으로 밀어붙이고, 떼를 쓰고, 수치심을 자극해 상대로 하여금 떠밀려서 수용하도록 강요하는 불건전한 시위문화는 이제 더 이상 지속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대통령이나 단체장을 비하하는 욕설이 난무하고, 억지와 불법을 불사하는 반인권적.비합리적 시위행태가 상존하는 한 이는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데 큰 걸림돌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적 약자의 인권보장 체계를 제도화하되 모든 부문에서 정당하고 합리적인 요구는 가능한 한 수용하고, 불법적 방법에 의한 주장은 배척되는 법과 원칙이 살아있는 사회라야 비로소 정의가 실현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정상성의 회복이며, 진정한 변화와 개혁인 것이다.

권력이든 집단이든 개인이든 간에 힘으로 밀어붙여 목적을 달성하려고 한다면 법치주의는 더 이상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만이 있을 뿐이다. 어느 한쪽의 인권이 존중되지 않으면 모두의 인권이 존중될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번 음미해 봐야 할 때다.

염홍철 대전광역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