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재 사진전문기자의 뒷담화] 37년 만에 핀 꽃 정미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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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전 정미조 선생을 인터뷰하려는데 시간이 어떠냐고 취재기자가 내게 물었다.
당연히 그 이름을 알고 있으리라는 듯 부연설명이 없었다.
낯선 이름이었기에 “누구?” 라고 물었다.

“가수 정미조 몰라?”라고 되묻기에 잠깐 뜸을 들였다.

오래지 않아 희미하게 얼굴과 노래가 기억났다.

“아! 옛날 가수. ‘개여울’ 그 노래”라 답했다.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그러했기에 나도 몰래 대뜸 나온 말이 ‘옛날 가수’이었다.

스케줄을 조율하다가 어렵사리 취재 일정이 잡힌 날이 일요일이었다.
그런데 바로 전 날 취재기자가 다시 일정을 조정하려 전화가 왔다.

“정 선생이 눈 치료 중이라 내일 사진을 찍는 걸 늦췄으면 하던데….”
“많이 불편하신가 보죠?”

그 후 조정된 일정을 취재기자가 통보해왔다.

인터뷰는 예정대로 일요일에 진행하고 사진은 화요일에 찍는 걸로 정했다고 했다.
그날 잡힌 아침 생방송을 마치고 바로 스튜디오로 오겠다고 했다.

인터뷰 내용을 듣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정 선생의 사정이 그러하다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나마 ‘아침 생방송’이 있다는 게 위안이었다.

‘꿩 대신 닭’이라고 생방송을 보고 회사로 달려나오면 얼추 시간이 맞을 것 같았다.
그간 어찌 살았는지, 어떤 사연이 있는지 방송을 통해서라도 알고 싶었다.

방송에서 정 선생은 37년 만의 복귀라고 했다.
가수를 그만두고 파리로 그림 유학을 간 것은 자유를 찾기 위해서라고 했다.

유학과 공부 그리고 예술가로서의 고독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새로운 노래 ‘귀로’를 들려줬다.
그 곡을 녹음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고 했다.

가사가 예사롭지 않게 다가왔다.
‘나 그리운 곳으로 돌아가네.
멀리 돌고 돌아 곳에’(귀로)

방송이 끝나자마자 택시를 타고 회사로 내달렸다.
택시 안에서 ‘자유, 고독, 귀로’ 세 단어가 계속 맴돌았다.

다행히 정 선생보다 먼저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서둘러 조명을 준비하는데 정선생 일행이 스튜디오로 왔다.

분장실 거울을 보며 화장을 고치는 정 선생에게 물었다.

“오늘 사진의 주제를 어떻게 잡을까요?”
“어휴! 알아서 해주세요.”
“아침 방송을 막 보고왔는데요. ‘자유, 고독, 귀로’중에 어떤 걸로 하시겠어요?”
“귀로가 타이틀 곡이니 귀로가 좋겠네요.”
“거울을 보시는 모습이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선 내 누님 같은 꽃’이네요.”
“하하, 37년 만에 핀 꽃인가요?”
“아 그거 좋네요. 37년 만에 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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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하는 순간 정 선생의 스카프가 눈에 들어왔다.
얼룩얼룩한 문양이 물봉선의 꽃잎처럼 보였다.

“선생님! 목에 두른 스카프를 머리고 두르고 사진을 찍는 건 어떻습니까?”
“머리에 두르기는 너무 화려하지 않나요?”
“저는 화려해서 오히려 꽃잎으로 보이네요.”
“그런가요?”하는 대답에 썩 내키지 않음이 비쳤다.

이유가 짐작이 갔다.
검은색 상 하의에 흰 셔츠, 단순함이 돋보이는 의상이었다.
그 단순함에 보일 듯 말 듯 포인트를 주기 위해 두른 스카프였다.
그것을 머리에 두르자는 것은 정 선생의 패션 감각을 뒤엎는 것과 다름없었다.

“일단 한번 해 보시죠”라고 확신에 찬 듯 말했다.
사실 확신은 없었다.
어떻게든 ‘37년 만에 핀 꽃’을 만들어 보고자 확신에 찬 듯 말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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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정 선생의 노래 ‘귀로’를 틀었다.
조명 앞에 선 정 선생이 갑자기 노래를 따라 불렀다.
이런 호사가 있을까?

스튜디오를 감도는 나지막한 목소리,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것마저 주저하게 했다.
그래도 그 표정을 카메라에 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행복한 표정이었다.

노래가 끝난 후, 스카프를 머리에 둘렀다.
그 스카프가 꽃잎으로 피려면 바람이 필요했다.
선풍기를 틀었다.

의도한 대로 스카프가 날리지 않았다.
바람에 따라 제 맘대로 엉키고 휘날리는 스카프,
수십 번의 시행착오를 겪었다.

관건은 꽃잎처럼 펼쳐져야 할 스카프와 정선생의 표정이었다.
표정이 맘에 들면 스카프가 맘에 안 들고,
스카프가 맘에 들면 표정이 맘에 안 들기 일쑤였다.

내색 안 했지만 시행착오를 겪을수록 맘이 조급해졌다.
더구나 정 선생이 그 다음날 무대에 설 일이 있다고 미리 언질을 줬었다.
행여 감기라도 걸리면 낭패였다.
그래도 중도에 그만 둘 수는 없었다.

‘37년 만에 핀 꽃’을 찍겠노라 약속한 터니 어떻게든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삽시간에 발광하고 사라지는 조명 속에서 그 꽃이 보였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촬영은 거기까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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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을 마치고 돌아가며 정 선생이 내게 말했다.
“이제야 알겠네요. 왜 이렇게 찍자고 했는지….”

며칠 후 3월12일자 신문에 정 선생의 기사가 게재되었다.
[3월12일자 박정호의 사람풍경 기사 참조]

신문을 펼치자마자 그 기사부터 찾아봤다.
정 선생의 눈 상태가 궁금했다.
사진 찍는 일정을 바꾼 이유를 알고 싶었다.

“또 요즘 눈이 많이 불편해졌어요. 앞이 뿌옇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림을 다시 할 수 있을지….”
기사를 본 순간, 철렁했다.

꽃으로 피어야 할 삶의 이유도 기사에 있었다.

“세상은 잠시 머물다 가는 곳입니다. 그럴수록 아름다운 꽃을 피워야죠. 제가 노래를 다시 한다고 스타가 되겠습니까, 돈을 더 벌겠습니까. 하루하루 열심히 살 뿐입니다. 저 사막의 낙타처럼.”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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