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대통령의 입' 9년] 25. 남북 체제 비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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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 1972년 9월 남북적십자회담 본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을 방문한 북측 대표들이 서울시청 앞 지하철 건설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1972년 남북 적십자회담 대표들이 서울과 평양을 왕래하는 모습을 박정희 대통령은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우리의 '공개된 다원화 사회'가 북쪽의 유일사상 체제보다 과연 우월하고 강력한 체제인가를 확인해 보기 위해서였다.

박 대통령은 남북대화가 시작된 뒤 어느 회의 석상에서 "이제는 우리가 문을 열어놓고 서로 왕래하면서 한자리에 앉아 대화를 나누며 대결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보다 훨씬 더 어려운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말한 바 있다. 남북대화에 임하며 내부 단결의 필요성을 느끼고 그것을 강조하려는 뜻이었다.

따라서 공보비서실뿐 아니라 다른 여러 기관에도 수시로 지시가 떨어졌다. 박 대통령은 평소에도 신문.방송을 열심히 보는 편인데 특히 남북대화에 관한 한 아무리 작은 기사라도 빠짐없이 읽고 보았다. 박 대통령은 북한 대표들이 호텔에서 양식을 먹는데 서툴러 쩔쩔매는 모습을 비꼰 기사라든가 남한 측이 마련한 선정적인 공연을 보고 당황해 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 등에 몹시 언짢아한 적도 있었다. 이런 표피적인 것에 시선이 집중되면 남북 간 체제의 본질적인 차이가 제대로 주목받지 못할 수 있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양측 체제의 차이는 대표들의 비공식 만찬자리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북측 대표들은 열 명이면 열 명 모두 어쩌면 그렇게도 판에 박은 듯 똑같은 말을 하는지 마치 한 사람이 얘기하는 것 같았다. 공식회의장이 아니라 사적인 만찬장인데도 말이다. 사람이 아니라 거대한 바위를 대하는 것 같았다고 말하는 남측 대표도 있었다. 우리 대표들은 정반대였다. 자기 의견을 서슴지 않고 내놓았으며 북측 대표에게 당당하게 주장을 제시했다. 그야말로 '자유로운 다원화 사회 만만세'였다.

박 대통령이 은연 중 걱정했던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북측 대표단의 전체주의적 일사불란함은 진작부터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로 걱정할 것은 없었다. 그러나 우리측 대표들이 자유사회에 대해 지나칠 정도의 환상적인 기대감 내지는 자신감을 드러냈다가 북측과의 구체적인 대결에 부닥칠 경우 남한측이 과연 대화를 이끌어 갈 실질적 역량을 가질 수 있는가를 우려했던 것이다. 백 보 양보하여 대표단의 경우는 그렇다 해도 대화의 모든 기회를 선전의 무대로 이용하려는 북측의 정치 선전공세에 일반 국민을 '다원화'라는 이름 하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시켜도 될 것인가 하는 중대한 문제가 있었다.

돌이켜 보면 다원주의는 정치학의 영역에서조차 전체주의나 마르크스주의의 일원적 세계관이나 가치관에 대항하는 민주주의의 기본적 세계관 또는 가치관으로 표방되기 시작하였으나 철학적 깊이가 있는 개념으로까지 발전하진 못하고 있었다. 때문에 우리 학계에서도 당시에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항하는 하나의 새로운 용어에 불과했으며 현실적이며 기능적인 개념으로 정립되지는 못하고 있었다. 정치적 구호에 지나지 않았다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내공이 약했다는 것이다.

김성진 전 청와대 대변인·문공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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