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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빈곤과 자살을 방치하는 한국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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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서상목
지속가능경영재단 이사장
전 보건복지부 장관

한국에서 가장 대표적 복지 사각지대가 어디냐고 하면 많은 전문가가 노인 빈곤과 자살을 꼽을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세 배 이상이 되는 48% 수준의 노인빈곤율, 그리고 55세가 넘으면 연령이 높아질수록 급상승하는 자살률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젊어서 열심히 일해 ‘한강의 기적’을 이룬 주역들이 나이가 들어 생계 걱정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오늘날 한국 사회의 현주소다. 정말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비극적 현실이 언론 보도를 통해 널리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나 정치권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별다른 노력을 하고 있지 않다. 예를 들어 여야 정치권은 지난 5월 29일 공무원연금법 개정안을 처리하면서 ‘공적연금 강화와 노후 빈곤 해소를 위한 특별위원회’와 같은 목적의 ‘사회적 기구’ 구성 및 운영에 관한 규칙안까지 통과시켰다. 올해 10월 31일로 돼 있는 사회적 기구의 시한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구성에 관한 여야 간 논의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 결국 노후 빈곤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는 의지보다는 공무원연금법 개정 내용에 대한 비판을 잠재우기 위한 임시방편에 불과했던 것이다. 특별위원회와 사회적 기구의 구성이 심각한 노인 빈곤과 자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사람으로서는 큰 실망이다.

 1990년대 중반 이미 선진국 대열에 합류했고, 지금은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부상한 한국이 선진국 중 최악의 노인 빈곤 문제를 안고 있는 이유는 공적연금의 역사가 일천하기 때문이다. 대다수 선진국과 심지어 남미 국가들도 이미 20세기 초에 공적연금제도를 도입했기 때문에 지금은 거의 모든 노인이 연금 혜택을 받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공적연금은 이들 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게 시작됐다. 공무원연금이 60년에 가장 먼저 시작됐고, 이어 63년에 군인연금이, 그리고 73년에는 사립학교교원연금이 만들어졌으나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국민연금은 88년이 돼서야 처음으로 실시됐다. 직장 근로자를 대상으로 시작된 국민연금은 95년에 농어촌 지역으로, 그리고 99년에는 도시 자영업자에게 확대됐다. 이렇게 늦게 공적연금체계가 구축되다 보니 2014년 현재 60세 이상 인구 중 노령연금 수급자 비중은 35.3%에 불과하고 평균 연금액도 월 33만원에 그치고 있다.

 노인 빈곤 문제를 직접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가 기초연금이다. 2008년에 도입된 후 2014년에 개편된 기초연금은 그 대상이 65세 인구의 70%로 너무 넓은 반면, 연금액은 월 10만~20만원으로 낮기 때문에 노인 빈곤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이외에도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있으나 어느 선진국에도 존재하지 않는 부양의무자 조항 때문에 65세 인구의 6%만 혜택을 보고 있다. 그 결과 한국에서의 노인빈곤율은 2007년 45%에서 2013년에는 48%로 오히려 증가한 것으로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추계하고 있다.

 노인 빈곤 문제 해결을 위한 제도가 국민연금, 기초연금,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등 3개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인 빈곤 문제가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는 것은 기존 제도들이 부실하기 때문이다. 기존 노후소득보장제도의 문제점은 이미 많은 연구를 통해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65세 이상 노인 대상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와 기초연금제도를 통합해 노인 대상 공공부조제도를 신설하고, 지원 대상을 빈곤층으로 한정시키며, 연금액을 최저생활을 보장해 주는 수준으로 차등지급한다면 노인 빈곤 문제는 일거에 해소할 수 있다. 제도 변경 초기에는 추가적 예산 부담이 있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국민연금 수급자의 증가와 더불어 기초연금 수급자는 점차 축소될 수 있을 것이다.

 또 ‘반쪽 연금’이란 비판을 받고 있는 국민연금 역시 98년 이래 9%로 묶여 있는 보험료율 인상에 대한 국민적 합의만 이뤄진다면 근본적인 개선책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함께 국민연금과 기존의 특수직역연금들을 통합해 공적연금 부문에서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 역시 반드시 논의돼야 할 과제다. 개혁을 잘 못하기로 유명한 이웃 일본도 이 문제를 오랜 논의 과정을 통해 해결했는데, 위기 때마다 어려운 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뤄온 한국이 공적연금 개혁 하나 못해낼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정부와 여야 정치권은 공적연금 개혁은 어렵다고 생각해 이야기만 꺼내놓고 제대로 된 논의도 시작하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 요즈음 여당은 노동개혁, 그리고 야당은 재벌개혁을 하겠다고 연일 언성을 높이고 있다. 많은 노인이 생활고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상황을 방치하고 있는 정치권과 정부가 새로운 개혁을 하겠다고 말한들 누가 믿을 것인가 하는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서상목 지속가능경영재단 이사장·전 보건복지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