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 터치] 오뚝이처럼 일어선 '파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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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수일 감독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이하'파괴')가 13일 시작하는 제3회 프랑스 영화제에서 개막작으로 선보인다.

감독도 배우도 분명 한국인인데, 갑자기 프랑스 영화제 개막작이라니? 프랑스 측이 후반 작업비를 지원해 한.불 합작영화로 인정받았다는 설명이다.

정작 전수일 감독은 많은 생각이 들었단다. 영화 만들기가 이토록 힘겨울 줄이야….

'파괴'는 부산에서 처음 제작되는 상업영화다. 죽음의 문제를 파고든 스릴러다. '내 안에 부는 바람''새는 폐곡선을 그린다'로 여러 해외 영화제에서 호평받았던 전감독이 그간의 작가주의 성향에서 벗어나 대중에 좀더 가깝게 다가서려고 애썼다.

하지만 여건은 그리 좋지 않았다. 촬영 중 제작비를 대겠다고 나선 사람은 금방 꼬리를 감췄고, 심지어 다 찍은 필름마저 현상 과정에서 커다란 손상을 입었다.

지난 5월 열린 칸영화제 출품 직전에 일어났던 사건이라 마음이 더 쓰렸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일. 감독은 이번에 프랑스 파리까지 가서 필름을 긴급 복구해야 했다.

'파괴'의 순제작비는 13억원 가량. 저예산 영화인 건 분명하나 중요한 건 규모가 아니다. 감독은 말 그대로 그의 모든 걸 걸었다. 지인의 도움을 받아 어렵게 돈을 조달했고, 부산영상위원회의 장비 지원도 받았다.

정보석.추상미 등 스타 배우도 시나리오를 믿고 선뜻 출연을 결정했다. 경성대 연극학과 교수로 있는 감독은 심지어 이번 학기를 휴직하며 영화에 매달렸다.

감독은 이런 사실이 알려지기를 꺼렸다. 자칫 궁상맞아 보인다는 이유에서다. 작품을 작품으로 평가받기를 원하는 그의 심정이 십분 이해된다. 영화를 동정으로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 생각할 점은 있다. 상업영화.기획영화가 득세하는 요즘의 충무로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장인정신을 곱씹게 한다. 사실 지난해 이후 충무로가 비틀거린 것도 그런 철저한 자세, 즉 영화 하나에 전력 투구하는 열정이 부족한 까닭이 아닐까 싶다.

'파괴'는 '동승'을 떠올리게 한다. 전세를 월세로 돌리면서까지 '동승'을 만들었던 주경중 감독은 요즘 휘파람을 불고 있다. 영화의 성공으로 앞으론 돈 걱정 없이 찍을 수 있게 됐다고 즐거워 한다.

'파괴'에도 그런 날이 올지…. '파괴'는 오는 8월 열릴 베니스 영화제 진출을 노리고 있다. 필름은 잠시 '파괴'됐으나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선 '파괴'의 좋은 소식을 기다려본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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