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왜 갑자기 강경해 졌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3면

북한이 100달러짜리 수퍼노트를 만든다는 혐의를 포착한 것은 이미 1989년이었다. 그러나 북한에 대해 간간이 비난을 퍼붓는 정도였다.

그런데 이번엔 구체적인 조치에 들어갔다. 우선 북한의 거래은행(마카오 소재 방코델타 아시아)에 압력을 가해 북한 자금을 동결시켰다. 또 워싱턴에 있는 각국 외교관을 불러 북한의 불법 행위에 대해 상세한 브리핑을 해주는 등 다각도로 압력을 넣고 있다.

일각에선 북한의 위폐 제조 규모가 미국이 묵과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그동안 해마다 약 250만 달러 규모의 북한 위폐를 적발했으나 올해는 그 액수가 갑자기 1000만 달러로 늘어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치적 배경설도 유력하게 나돌고 있다.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 대북 강경파가 다시 득세했다는 것이다. 부시 대통령은 올해 초 6자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미스터 김정일'이라고 부르는 등 유화적인 제스처를 보였다. 미국이 6자회담을 성공시키려는 강력한 의지가 있다면 지금처럼 미묘한 시기에 북한 위폐 문제를 정면으로 치고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게 정치적 배경설의 핵심이다. 위폐 문제에 대한 공세의 배경에는 강경파의 입김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국무부 내 온건파를 대표하는 크리스토퍼 힐 동아태 담당 차관보도 20일 한국 특파원들과 만나 "6자회담 재개에 시한은 없지만 무작정 기다릴 수만은 없다"면서 "북한은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겠다는 약속을 먼저 이행하고 조속히 회담장에 나와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아직은 비관적이 아니며 잘될 수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지만 이는 역으로 국무부 분위기가 강경 쪽으로 선회한 방증이라는 지적도 있다.

미국이 위폐 문제를 놓고 공격을 계속할 경우 북한은 6자회담에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미국도 이 점을 알고 있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미국 역시 6자회담에 대한 기대를 접었을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워싱턴=김종혁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