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출발 땐 세월호, 귀국 땐 네팔 … 순방 '배드 타이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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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혜
정치국제부문 기자

12조원 규모의 중남미 원격 의료시장 진출, 78건의 양해각서(MOU) 서명. 박근혜 대통령이 ‘링거 투혼’을 발휘하며 9박12일 동안 콜롬비아·페루·칠레·브라질 등 4개국에서 일군 성과물이다.

 하지만 순방기간 동안 한국의 ‘외교 컨디션’은 박 대통령의 건강만큼이나 안 좋았다. 무엇보다 타이밍이 문제였다.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다. 콜롬비아의 요청으로 세월호 참사 1주기인 지난 16일 출발한 게 화근이었다. 콜롬비아 측은 자유무역협정(FTA) 조기 발효 약속 등으로 화답했지만 국내에선 꼭 그날 떠났어야 했느냐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비판의 절정은 22일이었다. 정부는 이날 오전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 협상이 타결됐다고 발표했다. 불과 이틀 전 핵심 당국자로부터 “외교부 장관이 대통령과 외유 중이니 이번 주는 어렵다고 보면 된다”는 답을 들은 마당이어서 황당했다. 외교부는 “타결 선언과 가서명을 빨리 해야 다음 절차도 진행할 수 있기 때문에 서둘렀다”고 했다. 하지만 4년6개월이나 끌어온 협상을 굳이 대통령도, 주무 장관도 없는데 ‘가서명’으로 마무리 짓는 건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는 게 중론이다. 이날 밤에는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중·일 정상회담 소식이 타전됐다. 황우여 사회부총리를 수석대표로 파견한 아시아·아프리카 정상회의 60주년 행사였다.

 “한국이 외교 후진국도 아니고 ‘중국과 일본의 정상이 온다니 우리 대통령도 인도네시아에 가야겠다’고 할 순 없지 않으냐”는 외교부 당국자의 항변도 일리가 있다. 정상의 해외 방문은 출발시간이 극비에 부쳐질 만큼 치밀하게, 오랜 기간 준비하기 때문이다. 중남미 순방은 지난해 결정됐다고 한다. 아쉬운 점은 인도네시아가 지난해 말 박 대통령을 초청하겠다는 의향을 밝혔을 때부터 외교 당국의 태도가 소극적이었다는 부분이다. “한국은 아직까지 반둥회의에 총리급 이상은 참석한 적이 없다”고만 했다. 황 부총리를 대표로 보낸 것도 그렇다. 이완구 총리가 정치 스캔들에 휘말려 어쩔 수 없었다지만 사회부총리가 온 것을 본 외국 사절들이 한국의 외교의지를 어떻게 평가했을까.

 순방길은 마지막까지 순탄치 못했다. 25일 네팔에서 대지진이 발생하자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26일 위로 전문을 보냈다. 박 대통령은 27일에야 위로 전문을 발송했다. 한국은 대통령이 탄 비행기가 땅에 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셈이다.

 순방으로 인한 ‘액땜’은 할 만큼 했다. 상황이 어쩔 수 없이 꼬였다면 변한 상황에서 다시 활로를 모색하면 된다. 아산정책연구원 봉영식 선임연구원은 “중·일 관계가 개선조짐을 보이고 있고 미·일은 아베 총리의 방미를 계기로 새로운 동맹 관계로 격상될 것”이라며 “이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기 때문에 한국에 나쁜 환경만은 아니다”고 했다. 상대국이 어디로 튈지 본 뒤 반응하는 게 절반인 외교에서 위기는 늘 있다. 중요한 건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느냐다.

유지혜 정치국제부문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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