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59)제80화 한일회담(58) 3차회담 결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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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일본측은 7월이래 무기휴회중인 한일회담의 재개를 우리측에 요구하면서 회담전반에 대해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면 어업문제만의 회담이라도 열고싶다고 제시했다.
제1차 회담에서 대일강화조약규정에의거, 우리측이 어업협정을 체결하자고 재의했을때 일본측이 미·가등과는 어업협정을 체결하면서도 우리와는 『아직 준비가 안돼있다』고 거절했던 전례에 비추어보면 당시 일본이 평화상문제로 얼마나 다급한 실정이었던가를 알수있겠다.
회담초기 일본측이 한국 수역내의 일본어선들의 지나친 조업행위를 규제하는 문제를 논의하자는 우리측의 요구에 진지하게 나왔더라면 사실 우리 정부는 평화선을 선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당시 전쟁중이었고 또 그때만해도해양에 대한 인접국의 관할영역에대한 개념이 지금처럼 관대하게 확대되어있지 않았다. 이같은 상활을 생각한다면 일본측이 조업의 자율규재에 성의있게 응했을 경우 과연 우리가 예견되는 국제여론의 집중포화를 감내하면서까지 평화선을 선포할수 있었을지에 대해서 나는 평화선 획정의 당무자로서 회의를 갖고있는 것이다.
지금은 다수 국가가 2백해리까지 자국의 독점적 어로수역을 선포하고 그 수역내에서 타국이 어로행위를 하려고 할 경우 쌍방간의 협정체결 또는 입어료지불을 전제해도 타국이 이에 맞설수 없을 만큼 인접국의 해양관할권 확대개념은 새로운 해양질서로 정립돼 가고있다.
그러나 당시의 국제해양법질서는 3해리가 주이고 최대가 고작 12해리 정도였으니 평화선선포가 던진 국제적 방향이 어떠했을 것임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겠다.
한일회담에 느굿한 입장에 있던 일본이 먼저 회담재개를 요청한 것만 봐도 평화선위압파는 실감날 것이다.
어업문제에 관한한 이제 정반대의 입장에선 우리 정부인 만큼 굳이 어업문제만 다룰 의향이라곤 조금도 없었따. 응하지 않을 조건인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카드를 조금씩 내미는 일본의 교섭기술은 어쨌든 참고할 만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당시 일본의 극우세력들은 평화선 선포와 그에 따른 일본어선들의 대거 나포사태에 대해 일본정부에 재일교포들을 모두 추방하자고 요구하는등 격렬한 반한운동을 전개했다.
9월22일 동경과 대판에서 열리 대규모반한데모에 살포된 전단과 플래카드는 『조선인 みんた귀い반せ( 국인을 모두 몰아내라)』가 구호였다.
전단내용은 가당치도 않은 주장과 오만불손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담았다.
『한국인의 거만하고 무례불손함은 역사가 증명하는 바이다. 청일·노일 두전쟁때 한국을 위해 바친 일본의 희생이 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라인(평화선)을 설정한 것은 침략행위와 같다. 한국인은 약한것에 대해서는 포악무도하면서 강한것에는 순하기가 고양이같다. 폭도의 일례를 들어보면 지난 3년간의 전란에서 수백만명의 인명이 살상된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이에서 보듯 일본이들의 한국관이 어느 정도 비뚤어져 있는가를 알 수 있고 이런 바탕이 있기 때문에 3차회담 9일만에 일본측 차보전 수석대표는 천연덕스럽게 대한 망언을 서슴없이 할수있었던 것이 아닌가고 나는 지금도 느낀다.
일본측의 대한관이 기본적으로 이처럼 왜곡되어 있던 사오항이었던 만큼 당시 일본측의 요구에 응해서 회담에 응했던 정부당구자들도 회담개막전부터 회담서오가를 비관적으로 전망했다.
조정환 외무차관은 회담개막 하루전인 5일 기자들과 만나 『또 무의미한 회담을 개시한다』고 마랗고 이번 회담이 하등 결실을 보지 못할 것이라는 해석의 몇가지를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이번 회담이 한일간의 제반문제를 해결하자는 의도에서 열리는 것이 아니라 일본측이 평화선내에서 어로작업을 할 수 ㅇㅆ도록 강구하려는 불순한 탐욕에서 회담이 개최된다는 점.
어로문제를 해결하고자 주장하는 일본이 회담개최일에 당면해서 평화선내에서 어로하려는 자국어선들에 대해 회권조치를 취하고있지 않은 점.
일본은 전과를 회개치못하고 재산 청구권주장에 있어서 착취성을 포기치않고 있는 점등….』
조차관의 예견대로 회담으 ㄴ보름여만에 결렬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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