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상업 본고장이자 정치·경제 실험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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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2000년을 보려거든 시안을 가라. 중국의 500년을 보려거든 베이징을 가라. 중국의 100년을 보려거든 상하이를 가라. 중국의 지난 10년을 보려거든 광둥을 가라.”

 1990년대 유행하기 시작한 이 말은 지금도 중국에서 민요처럼 퍼져 있다. 중국 남부의 최대 산맥 오령은 창장과 주장의 수계를 나눈다. 영남으로 불리는 광둥의 인문지리는 명사의 말 속에 녹아 있다.

 “광둥 사람은 사업가 정신이 풍부하다. 근심걱정이 적고, 호탕하고 싸움을 좋아한다. 인정을 모르고 돈을 물쓰듯 하며, 모험심이 강하고 진취적이다. 또 기이한 풍속이 있으니 광둥 사람은 고대에 뱀을 먹던 토착 주민의 유전자를 계승했다. 뱀고기 먹기를 좋아하는 것으로 볼 때 광둥 사람은 고대 백월(중국 고대의 월족) 민족과 혼합 혈통으로 보인다.” 중국의 문호 린위탕(임어당)의 묘사다.

 “광둥에는 언어·얼굴·피부색·지위가 천차만별인 무리들이 섞여 살았다. 광저우시와 인근 주민은 비교적 개화됐다. 그들은 지능·창업정신 면에서 다른 지역의 중국인보다 뛰어났다. 광둥 사람은 큰 장사와 대형 교통업 경영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그들은 예로부터 형성된 상업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고 가르침을 받아 전형적인 사업가 집단을 일궜다. 광둥 사람은 다른 각 성, 특히 바다와 인접한 성의 대도시에서 활약했다.” 실크로드란 단어를 만든 독일의 지질학자 페르디난트 폰 리히트호펜은 광둥을 이처럼 상업의 본고장으로 묘사했다.

 말레이시아 화교 출신으로 9개 언어에 능통했던 청 말 민국 초의 유학자 구훙밍은 “상인이란 하늘이 개었을 때 우산을 당신에게 빌려준다. 비가 내릴 때 우산을 도로 가져가는 종족”이라고 말했다. 바로 광둥 상인의 장삿속을 잘 보여주는 말이다. 중국 역사에는 소금장사로 흥성한 안후이 휘상, 도처에서 전장을 열었던 돈장사의 귀재 산시 진상, 근대로 접어들어서는 닝보 상방과 광둥의 대상인들이 실업가로 굴기했다.

 올해는 을미년 양의 해다. 광둥의 성도인 광저우의 별칭이 ‘양의 도시’다. 먼 옛날 하늘에서 다섯 색의 양을 타고 내려온 신선이 만든 도시라는 전설에서 붙은 이름이다. 당시 이곳에는 가뭄이 심했다. 다섯 신선들은 주민들을 위해 다섯 색깔의 벼 이삭을 선물했다. 신선들은 떠났지만 양 다섯 마리는 이곳에 남아 날씨를 조절해 영원히 기근이 들지 않도록 보살폈다. 광저우시는 이를 기념해 59년 웨슈공원에 11m 높이의 오양 석상을 세웠다.

 중국 역사에 광저우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기원전 214년 진시황이 남해를 공략하라고 명령하면서다. 비옥한 주장 델타 북쪽에 자리잡은 광저우는 중국의 가장 중요한 남방 항구였다. 당대에는 해상 실크로드의 출발점으로 중국의 비단과 서역의 재화가 이곳에서 교역됐다. 16세기 포르투갈인이, 17세기에는 영국인이 이곳에 무역소를 세웠다.

그렇다고 광둥 사람이 모두 돈만 밝히고 이윤만 좇는 상인만은 아니었다. 태평천국 운동의 홍수전, 무술변법 운동의 강유위, 신해혁명의 손중산(사진)까지 근대 중국의 3대 변혁운동이 모두 광둥 사람이 일으켰거나 이끌었다. 광저우는 공산 혁명의 무대이기도 했다. 1927년 12월 11일 장제스에 반대하는 봉기로 광둥코뮌이 수립됐다. 비록 3일 천하로 끝났지만 소설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 등 수많은 조선혁명가들이 활약했다. 이들은 광둥 동부 하이루펑(海陸豊)에 중국 최초의 소비에트를 건설했다. 79년 경제특구가 세워지면서 광둥은 개혁개방의 성지로 탈바꿈했다. 지금도 중국에서 선도적인 정치·경제 실험은 대부분 광둥에서 이뤄진다.

신경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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