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의 얼굴없는 천사 15년째 찾아 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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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연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성금을 놓고가는 전북 전주시 '얼굴 없는 천사’가 올해도 찾아왔다. 벌써 15년째다.

29일 오후 3시40분쯤 전주시 덕진구 노송동 주민센터에 전화가 걸려왔다. 40~50대 남성으로 짐작되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주민센터앞 세탁소 주변의 승합차량 뒤에 박스가 있다. 불우한 이웃을 위해 써 달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달려나간 직원들은 차량 뒤에 놓인 A4용지 박스를 발견했다. 상자 안에는 5만원권 100장 묶음 10개와 돼지저금통에 든 동전 등 총 5030만4390원이 들어 있었다. ‘소년소녀 가장 여러분, 힘 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메모지도 나왔다.

전주 얼굴 없는 천사의 기부는 2000년 4월 한 초등학생이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세요”라는 말과 함께 노송동 주민센터에 58만4000원이 든 저금통을 놓고 가면서 시작됐다. 그 뒤 매년 크리스마스를 전후해 한 해도 빠짐없이 노송동 주민센터 앞 공중전화 부스와 화단 등에 성금을 놓고 갔다. 2009년에는 ‘어머니께서도 안 쓰시고 아끼시며 모은 돈이다. 어머님의 유지를 받들어 어려운 이웃을 위해 쓰여졌으면 한다’는 쪽지와 함께 8026만원을 놓고 갔다.

지금까지 성금횟수는 모두 16회, 전체 금액은 3억4800여만원에 이른다. 성금은 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통해 소년ㆍ소녀 가장이나 홀로 사는 노인 등을 돕는데 쓰이고 있다.

얼굴없는 천사의 신원은 베일에 가려 있다. 2000년 4월에 처음 온 당시 초등학생과 전화를 하는 50대 남성을 가족으로 추정할 뿐이다. 몇년 전에는 한 방송사가 얼굴없는 천사를 찍으려고 몰래카메라를 설치하려다 "순수한 뜻을 어지럽힌다"는 주민들의 반발에 포기하기도 했다.

전주시는 노송동 주민센터 옆에 ‘얼굴 없는 천사여, 당신은 어둠 속의 촛불처럼 세상을 밝고 아름답게 만드는 참 사람입니다’라는 글귀를 새긴 기념비를 세우고, 주변도로를 ‘얼굴 없는 천사의 거리’로 이름지었다.

전주=장대석 기자 dsj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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