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삶과 문화

너와 나, 우리는 중생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6면

지난 가을 나는 뉴질랜드에서 심리치료사로 활동하는 분이 쓴 '심리 분석적 관점에서 본 서양 중생들의 삶의 고통'이라는 논문을 논평할 기회가 있었다. 이것은 그가 뉴질랜드에서 주로 서양인 환자들을 치료한 경험을 바탕으로 서양사회가 안고 있는 심리와 정서적인 문제를 분석한 것이다. 이 논문에서 그는 서양 사회가 안고 있는 고통의 출발이 가족 붕괴며, 이로 인해 버려진 외로움으로 서양 사회가 신음하고 있고, 이 '외로움'과 '불안'이 서양인들의 정신을 병들게 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 소운 스님

하지만 나에게 이 논문이 흥미로웠던 점은 서양 사회에 대한 진단보다 그가 논문을 쓰게 된 동기를 고백하는 대목이다. 한국인인 그는 뉴질랜드에서 심리치료사로 일하기 전에는 서양인이 자신과 같은 중생이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서양인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그들도 자신과 같이 고통의 윤회 속에 있는 중생임을 깨달았고, 그래서 어떻게 그들의 고통을 해결해 줄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다고 한다.

이 논문을 평하는 동안 나는 그와는 달리 현재 서양 사회의 문제가 바로 우리가 직면한 문제며, 인류가 시작된 이래 형태를 달리하며 늘 존재하는 우리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삶의 고통이 어찌 서양인에게만 있겠는가. 붓다 당시에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인도 여인 기수고타미가 붓다를 찾아가 "제발 한번만 내 아들을 살려 달라"고 호소했다. 그러자 붓다는 "그러면 이 나라 안에서 한번도 사람이 죽은 적이 없는 일곱 집에서 좁쌀 하나씩을 가져오면 비로소 소원을 들어주겠노라"고 약속하셨다. 물론 그런 집이 있을 리 만무하다. 한참을 헤맨 뒤 지친 몸을 이끌고 여인이 다시 붓다 앞에 돌아왔다. 붓다는 그때야 그녀를 위로하시며 '삶이 무상하여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는 것과 누구도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음'에 대해 설법을 행하셨다고 한다. 붓다의 설법을 들은 여인은 죽음의 고통이 자신만의 것이 아님을 깨닫고 아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평화로워졌다고 한다.

이 사바세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일장춘몽이다. 삶은 죽음으로 종결될 수밖에 없는 하나의 달콤한 꿈, 뒤돌아보면 허망한 신기루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단순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삶의 고통은 나만의 것인 양, 아니면 타인의 것인 양 생각해 서로 반목하여 대립과 갈등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그래서 가진 자는 가지지 못한 자를 멸시의 눈으로, 가지지 못한 자는 가진 자를 증오의 눈으로 바라볼 뿐이다. 어떤 다른 외형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운명은 같다. 다만 잠시 집착에 의한 착각에 빠져 있을 뿐이다.

심리치료사는 삶의 고통을 통해, 인도 여인은 죽음을 통해 나와 너는 삶의 고뇌에 찬 중생, 높은 명예도 거대한 부도 놓고 떠나야 하는 운명이라는 깨달음에 도달했다. 이 깨달음은 그들의 삶을 평화롭게 했을 뿐 아니라 나와 너는 서로 다르지 않다는 평등심과 이웃의 고통이 바로 내 고통처럼 느끼는 자비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 이 깨달음에 도달할 것인가. 우리 사회가 외치고 있는 '함께 잘 살아보자'는 슬로건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대립의 장벽을 넘는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자비심을 체험해야 한다. 우리가 서로를 자식에게 더 나은 미래를 보장해 주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고뇌하며 살아가는 필부, 두 어깨에 삶의 무거운 짐을 지고도 포기할 수 없는 중생이라는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이기와 반목과 대립보다 양보와 넉넉함으로 서로를 자비와 사랑으로 얼싸안을 수 있을 것이다.

소운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