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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애국심이 우리보다 강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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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애 기자 중앙일보
고정애
런던특파원

요즘 자꾸 우리의 현충일이 떠올랐습니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는 기념식 말입니다.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넋을 기린다는데 딱딱하기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일상의 우리와는 별 관계 없는 일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저 공휴일 중 하나일 뿐입니다.

 “영국인들의 애국심이 우리보다 강한 것 같다.” 런던에서 지내는 한국인들이 종종 하는 얘기입니다. 저 역시 비슷한 생각이 스치곤 합니다.

 한두 달 전부터 길을 걷는 이들의 가슴에서 어렵지 않게 포피(poppy·양귀비꽃)를 보곤 합니다. 남자도 여자도입니다. 양복집 마네킹에서도 봤습니다. 한 신문에 “포피를 달아야 한다는 시회적 압력이 있는 건 문제”란 글이 실린 것도 봤습니다.

 포피는 제1차 세계대전 때 격전지였던 벨기에의 플랑드르 들판에서 흐드러진 꽃입니다. 당시 캐나다군 소속인 존 매크레가 ‘만일 당신들이 여기서 전사한 우리들의 죽음을 외면한다면/ 여기 플랑드르 들판에서 양귀비꽃이 자란들/ 우리는 편히 눈감지 못할 것이다’라고 노래했지요. 그는 전사했지만 그의 시는 살아남았습니다. 영연방에서 포피가 전사자를 기리는 상징이 된 것은 그의 시 덕분이기도 하지요.

 올해엔 특히 런던탑 해자가 세라믹 포피로 가득했습니다. 7월 초부터 전사자 추도일인 지난 11일까지 심었습니다. 왜 넉 달이나 걸렸냐고요? 절대량이 많았습니다. 88만8246송이였으니까요. 바로 1차대전 중 숨진 영연방 군인들입니다. 꽃 한 송이가 한 생명인 겁니다. 촘촘히 심었는데도 해자를 가득 메울 정도로 88만8246이 어마어마한 숫자란 것도 절감할 수 있습니다. 500만 명이 직접 현장을 찾은 이유일 겁니다. 이방인인 저도 먹먹해지곤 했습니다.

 영국에 오래 산 이에게 “1차대전 100년이어서 이러냐”고 물었더니 그가 심드렁하게 “우리는 원래 이래요. 올해 좀 행사가 많긴 하지만”이라고 말했습니다. 하기야 1차대전 직후 웨스트민스터 사원엔 무명용사 시신 한 구를 매장했다지요. 명문엔 ‘사람들은 이 자를 왕들 가운데 묻었다. 신과 신의 집을 이롭게 했기 때문이다’라고 새기고.

 모름지기 국가엔 국민을 묶어주는 뭔가가 있습니다. 전승돼 현재화하는 공통의 체험입니다. 영국에선 그게 양차 대전의 희생과 헌신이란 생각이 들곤 합니다. 요새 어린 꼬마도 추모시설에 “잊지 않겠습니다. 고손자가”란 글을 남깁니다.

 이해는 갑니다. 1차대전 때 가장 활동적인 연령대의 남성 10명 중 한 명이 숨졌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직·간접적으로 누군가를 잃었다는 얘기입니다. 이들을 기리지 않는다면 정상적인 국가로 기능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영국은 게다가 얼마 전까지도 아프가니스탄에서 피를 흘리는, 종종 전쟁을 하는 국가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자꾸 우리를 돌아보게 됩니다. 우린 어떤가요.

고정애 런던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