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가을 우체국 앞에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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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멀지 않으세요?” 직장을 옮긴 후로 숱하게 받은 질문이다. 대답은 간단하다. “생각보다 안 멀어요.” 여기서 말하는 생각은 내 생각이 아니라 너(질문자)의 생각이다. 멀다는 건 느낌이다. 자(尺)로 재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잰다. 얼마나 떨어져 있어야 먼 것인가. 걸어서 10분 걸려도 멀다는 사람이 있고 기차로 한 시간 걸려도 가깝다는 사람도 있다. 결국은 느낌이다. 가는 길이 지겨우면 멀게 느껴질 것이다. 가는 길이 즐거운 나는 짧고 굵게 말한다. “안 멀어요.”

 가는 길뿐 아니라 오는 길도 즐겁다. 사직동에서 명동까지 20분쯤 걸어가서 광역버스를 탄다. 버스는 20분에 한 대꼴로 온다. 눈앞에서 놓치면 20분을 더 기다려야 한다. 그럴 땐 추억의 노래를 벗 삼으면 된다. “마음을 조이며 기다리는 기쁨도 있다.”(정미조의 ‘그리운 생각’ 중에서) 드디어 버스에 오르면 학교가 있는 수원시 월드컵로까지 약 40분이 걸린다. 버스는 고속도로 전용차선 위를 씽씽 달린다. 작은 차들의 사열을 받으며 나는 느긋하게 신문도 읽고 노래도 듣는다. 가끔은 도시락도 먹는다. 나는 매일 소풍 가는 남자다.

 걷는 길의 중간 자락에 광화문우체국이 있다. 우정사업본부 건물이다. 한자를 모르는 청소년들은 친구를 알선하는 단체로 알 가능성도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우정(郵政)은 우정(友情)이 바탕이니까. 건물 앞에는 빨간 우체통이 소품처럼 놓여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마지막으로 종이편지를 쓴 게 언제던가. 우표를 붙여 우체통에 집어넣은 기억이 아득하다.

 연애편지라는 말은 이제 ‘가요무대’에서나 듣게 됐다. 솔직히 내가 결혼에 성공한 비결은 편지였다. 사모의 극한을 종이에 담은 덕분이다. 아내는 그 편지로 마음이 움직였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휴, 이모티콘으로 감정을 배달하는 시절에 안 태어난 게 천만다행이다.

우체국은 어느새 가을의 정경 속으로 들어왔다. 이어폰을 꽂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노래를 들으며 부지런히 그 앞을 지나간다. ‘난 외롭지 않아요’라고 주장하지만 미덥지가 않다. 혹시 윤도현 밴드의 노래를 들려주면 마음의 속내를 내비칠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오래 남을까/ 한여름 소나기 쏟아져도 굳세게 버틴 꽃들과/ 지난겨울 눈보라에도 우뚝 서 있는 나무들같이/ 하늘 아래 모든 것이 저 홀로 설 수 있을까.”(김현성 작사·작곡 ‘가을 우체국 앞에서’)

주철환 아주대 교수·문화콘텐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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