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속의 「보트·피플」 망국 6년의 한 서린 현주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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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4월30일. 75년 월남패망으로부터 꼭 6주년이 되는 날. 「사이공」 최후의 날에 우리 해군 함정을 타고 1천3백여 명의 월남난민이 조국을 탈출, 우리 나라에 입국함으로부터 시작된 「한국 안의 월남사회」는 아직도 망국의 상처를 씻지 못한 채 새 땅에서 새 삶의 뿌리를 내리기에 힘겨운 도전을 계속하고 있다.
월남패망 이후 우리 나라에 입국한 월남난민의 총수는 올 4월20일 현재로 2천3백52명(보사부 집계).
입국난민 가운데 3분의2에 가까운 1천5백13명은 부산에 마련된 월남난민 수용소에서 머무르다가 1∼2년 안에 미국 등 제3국으로 다시 이주했다. 이주 대상국은 75%가 미국, 나머지는 「프랑스」·「캐나다」·서독·「벨기에」·호주 등이다.
남은 국내 잔류자는 8백38명. 그 중 62명은 지난 4월11일 입국, 부산의 수용소에 있는 선상난민이며 20명은 적십자사가 장기 보호중이다. 이들을 빼면 월남인 사회의 성원이 되는 난민은 모두 7백56명이다. 이중 여자와 어린이가 90%.
80%가 서울에, 나머지가 인천·부산 등 전국에 분산돼 있으며 서울에서는 서강·미아동·영등포 등 3개 지역에 많이 몰려 산다.
이들은 대부분 월남에서 한국인 남자와 동거, 아이를 갖게된 여성들로 막상 한국에 왔으나 본부인이 있는 한국인 남편으로부터 버림을 당하거나 제대로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월남난민 구호에 중심적인 역할을 맡고있는 한국 기독교 봉사회(이사장 표용은 목사)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 남편과 동거하거나 도움을 받는 숫자는 30%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는 3∼6명의 자녀를 혼자서 부양해야 할 처지의 여가장들.
평균학력이 중학 중퇴 정도밖에 안 되는 데다 별다른 기능도 없이 아이들이 3∼6명씩이나 딸려 있어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극히 한정돼 있다. 공장 종업원이나 파출부·청소부로 일하는 것이 고작이고 상당수는 술집이나 카바레 등에 나가고있다. 자기 집을 가진 사람은 물론 없고 정부의 정책지원금 또는 사회 단체의 지원금으로 단칸 월세 또는 전세방에 살고 있다.
월 소득은 평균 6만∼7만원선. 교회·사회단체에서의 부정기적인 구호금품이 이들에겐 적지 않은 도움이 되고있다.
한국인 남편과 정식 결혼이 되지 않은 여인들은 호적도 없고 주민등록도 안 돼 있다. 때문에 어린이 취학은 학교장의 재량에 따라 청강생 형식으로 하고 있으며 의료보호 혜택도 받지 못한다.
이들 난민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방세와 겨울의 추위. 따뜻한 열대나라에서 의·식·주에 별달리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던 이들에겐 비싼 방세가 6개월마다 다시 오른다는 것이 당혹스럽다. 겨울 추위도 여전히 견디기 힘들다.
이들의 가장 큰 소망은 월남인끼리 의지하며 살 수 있는 집단촌이나 공동사업장을 마련하는 것. 난민회와 기독교 봉사회를 중심으로 추진하고 있으나 자금이 문제가 되고있다.
특히 최근 월남난민들의 「대모」로 정신적 지주 노릇을 해오던 「구엔·티·록」여인(47)이 중병으로 쓰러져 난민들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고 있다. 난민회 활동도 중단상태다. 서울 창전동 「구엔」 여인의 셋방에는 낯선 땅에서 마음의 의지가 돼주던 대모의 쾌유를 비는 난민여인들의 정성이 줄을 잇고 있으나, 그들의 빈약한 경제력으로는 치료에 큰 도움을 주지 못하는 실정이다. <문병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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