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0억 대 금괴를 시세보다 싸게 판다 속여 수백억대 사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진짜 금괴를 이용해 사기행각을 벌이려던 일당이 경찰에 검거됐다. 서울 송파경찰서는 1700억 원대 금괴를 시세보다 싸게 판다 속여 수백억 원을 가로채려한 혐의(사기미수)로 김모(58)씨를 구속하고 알선책인 강모(52)씨 등 일당 4명을 불구속 입건했다고 20일 밝혔다. 경찰에 검거된 일당 중에는 전직 경기도의회 비례대표 의원인 C(48)씨도 포함돼 있었다. 사기 범행에 진짜 금괴를 이용하다 적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씨는 지난 3월 잠실관광호텔 로비 커피숍에서 대부업자인 박모(52)씨를 만났다. 박씨는 금 제련사인 강모(52)씨로부터 “금괴를 시중가의 절반에 파는 사람이 있는데 관심이 있으면 한 번 만나봐라”는 제의를 받고 커피숍에 나온 것이었다. 김씨는 박씨에게 1㎏ 짜리 골드바(금괴) 5개를 보여줬다. 개당 5000만 원씩 총 2억5000만 원 상당의 금괴였다.

김씨는 “1700억 원 상당의 금괴가 있는데 오늘은 샘플로 5개만 갖고 왔다”며 “샘플 금괴 5개를 시세보다 싼 1억 원에 먼저 넘기겠다”고 말했다. 나머지 금괴들도 300억 원을 수표로 갖고 오면 넘기겠다고 박씨를 설득했다. 박씨는 시중가의 절반에 금괴를 산 후 이를 되팔아 큰 이익을 볼 생각이었다. 금괴를 거래하기 위해 수표로 5억 원을 찾아오기도 했다. 커피숍에는 김씨 측 일행 8명과 박씨 측 일행 3명 등 11명이 모였다. ‘큰 거래가 성사된다’는 소문에 구경 온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김씨의 계획은 진짜 금괴가 가짜로 오인되며 틀어졌다. 박씨와 함께 온 감정사가 “가짜 금괴를 이용해 사기행각을 벌이는 사람이 많으니 금괴가 진짜인지를 먼저 확인해야 한다”며 박씨를 말렸다. 이에 김씨가 “금괴를 사지도 않고 왜 확인을 하냐”고 거부하자 거래가 깨졌다. 박씨는 김씨를 가짜금괴 사기범으로 의심해 경찰에 신고했다.

거래가 깨져 호텔을 떠나려던 김씨 일행은 경찰이 출동하자 렌트한 승용차를 버리고 도망쳤다. 차 안에는 김씨가 갖고 있던 금괴 5개가 고스란히 들어있었다. 경찰은 현장에서 압수한 금괴가 가짜라고 생각했지만 국립과학수사원 감정 결과 순도 99.99%의 진품이었다.

김씨가 갖고 있던 금괴는 사기로 획득한 장물로 드러났다. 김씨는 2009년 8월 이모(44)씨 등 3명에게 "전직 대통령이 월남전 이후 한국은행에 보관한 미국달러와 정치인들이 찍어 놓은 구권화폐를 신권으로 교환하는 일을 국가기관으로부터 부탁받았다”며 접근했다. ‘창’이라는 있지도 않은 비밀 국가기관의 이름도 거론했다. ‘창’은 창고의 줄임말로 오래된 국가자산을 현금화하는 역할을 하는 기관으로 그럴듯한 설명을 붙였다.

김씨는 금괴 10㎏을 준비해주면 이를 자신이 속한 해외 범죄조직에 보내 자금을 받아 일을 처리할 수 있다며 이씨 등을 속였다. 이씨 등에게는 이익금으로 각각 1000억 원 씩을 약속했다. 이씨에게서 금괴 5개와 현금 1억 원 넘겨받자 김씨는 바로 잠적했다. 이 일로 김씨는 지명수배를 받고 있는 상태였다.

김씨는 이 금괴를 4년 동안 갖고 있다 금괴를 ‘뻥튀기’를 할 목적으로 이번 범행을 계획한 것이다. 금괴를 녹여 팔 경우 받을 수 있는 2억 원을 포기하고 대신 사기로 300억 원을 받을 수 있게 범행을 '설계'했다. 실제로 김씨는 박씨가 300억 원을 주지 않을 경우도 대비했다고 한다. 나머지 금괴 가격을 주지 않으면 1억 원에 판 금괴를 다시 돌려받는다는 내용이 포함된 계약서를 제시한 것이다.

김씨는 알선책들에게 거래된 금괴 1개당 200만 원씩의 수수료를 약속하고 피해자를 물색하게 했다. 모 정당 부대변인 출신이자 도 의원을 지낸 C씨도 이 수수료에 혹해 피해자를 소개했다. C씨는 경찰조사에서 “김씨가 실제로 금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소개를 해준 것”이라며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또 주범인 김씨 역시 “진짜 금괴 300개를 갖고 있지만 검찰에 가서 말하겠다. 금괴를 사준다면 지금 바로 보여주겠다”라며 혐의를 부인하고 있는 상황이다. 경찰 관계자는 “검거된 일당 대부분은 골드바 사기나 달러 사기로 적발되거나 조사를 받은 적이 있는 만큼 김씨에게 금괴가 없다는 것을 알고도 사람을 소개해주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광진구 중곡동 김씨의 집에서는 다량의 외국화폐와 도자기 등이 나왔다. 금괴 거래 계약서, 달러 계약서, 5만 원권 교환계약서 등 사기행각에 사용할 목적으로 만든 가짜 계약서도 발견됐다. 송파서는 추가 범행이 있을 것으로 보고 여죄를 수사 중이다. 송파서 관계자는 “전ㆍ현직 대통령의 비자금 통장이 있다며 사기행각을 벌이는 사람이 많다”며 “금괴나 채권 등을 시세보다 저렴하게 판매하는 경우 주의를 기울이고 금 등은 정식 거래소를 이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안효성 기자 hyoza@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