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2)|제72화 비관격의 떠돌이 인생<제자=필자>-『조선 민요집』출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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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어떤 사회 어떤 인물에게도 적이란 것이 있다. 부 세출의 대 시인 북원 백추에게도 그를 질시하고 중상하는 좁쌀낟 같은 군소의 적이 있다는 것은 별로 놀랄 일이 못된다. 그러나 나로 해서 선생이 본의 아닌 「자진기고」를 했다면- 그로 말미암아 이런 개벼룩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라면. 이것은 평생을 두고도 갚지 못할 큰 빚이 아닐 수 없다.
그 해가 가고 이듬해가 지나도록 햇빛 을 보지 못했다가 3년째 되는 1929년 초가을에야 그 책이 태문관 이란 데서 출판되었다.
북원 백추 서. 산전경작 채보에다 전라산 철판지로 거죽을 싼 표지에는 그 당시 일본 화단의 제 l급 화가인 「기시다·류우세이」의 목판화 「장자괴뢰도」가 그려진-. 개조문고와는 비할 나위 없는 사치스런 책이었다.
『기회는 뒤에 올수록 좋다』는 생활철학 하나를 배웠다.
책이 되기 전, l929년 봄에, 산전경작(후년 작을 상으로 개명)씨가 채보해 준 오선지를 손에 들고 나는 대 삼에서 「피아노」있는 집을 찾아 다녔다.
「육자배기」의 본고장인 전라도 출신의 황자연 이란 청년이 마구에서 초밥 집 배달 꾼 노릇을 하고있는 것을 알게되어 그 청년을 데리고 「신바시」에 있던 산전경작 씨의 「스튜디오」에 l주일을 다니면서 채보 한 것이다.
황군은 겨우 스무남은 살 되는 젊은 나이인데다 자기고장의 노래를 부른다고는 해도 물론 전문가는 아니다. 「피아노」가 놓인 산전씨의 「스튜디오」에서는 긴장된 탓인지 제대로 목청이 나오지 않는 데다, 부를 때마다 어딘가 조금씩 음계가 달라진다.
하루나 이틀이면 끝날 줄 알았던 「육자배기」한 곡조 채보에 l주일 나 날자를 잡아먹은 것은 그 때문이다. 녹음기 한대만 있었더라면-, 그러나 그 시절에 녹음기란 요즘의 외제 고급 승용차 만한 사치품이었다(그것도 지금 같은 「테이프」식이 아니요, 「피아노」선 같은 철사를 늘인 거창한 장치다). 그 뒤 몇 해를 두고 민요를 채집할 때마다 나는 간편한 휴대용 녹음기를 누가 고안해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일본악단의 최고봉이라고 하던 산전씨 같은 분이 l주일이나 걸려서 손수 채보해 준 것은 물론 백추 선생의 소개 덕분이다.
조선민요의 율조에는 우 음이 많아 「피아노」같은 악기로는 좀처럼 포착이 어렵다. 산전씨의 채보를 의심한다는 것은 아니나 실재의 효과를 「테스트」하지 않고는 안심할 수가 없다. 대삼에서 「피아노」있는 집을 찾아다닌 것은 그 때문이었다.
몇 군데서 물어서 그럴듯한 집을 하나 찾아냈다. 「사또·데스」란 문패가 달린 자그마한 양옥집-. 소관을 이야기했더니 쾌히 승낙을 해주었다.
그런 인연으로 해서 그 옛날 「패리스」여 학원에서 「소오마·곡꼬오」(신숙에서 이름난 중촌옥의 여주인)여사를 가르쳤다는 「피아니스트」좌등 여사를 알았고, 마침 봄방학으로 경도삼고 에서 집에 와있던 여사의 둘째 아들 「이께·마사지」군을 알게 되었다.
방문을 드나들 때마다 허리를 굽혀야 할만큼 키다리인데다가 도수 강한 근시안경을 낀 지라는 사내는 첫인사 때부터 눈은 딴 데를 보고있는 그런 무뚝뚝하고 붙임성 없는 친구인데도 어디가 마음에 들었던지 그후로는 가끔 셋방살이하는 나를 찾아오곤 했다.
그해 가을 들어 독일 비행선 「췌페링」호가 세계 일주 길에 동경하늘에 나타난 바로 그날 밤, 백추 선생은 나를 위해서 분에 넘치는 출판기념회를 발기해 주었다. 여름방학으로 집에 돌아와 있던지 군이 제 자형의 신사복 한 벌을 빌어 와서 나는 그 신사복을 입고, 그날의 회장인 문예 춘추사 건너편에 있는 「레스토랑」「쓰꾸바」로 나갔다.
일본 시단의 「베스트·멤버」가 한자리에 모인 느낌이었다. 백추 선생이 이날 밤의 간사 역이며 사회자 노릇을 했다. 자부가 강하기로 이름난- 남의 찬숭은 받아도 남에게 허리를 굽힐 일이 없는 이 분이 나 같은 외래종인 후배를 위해서 사회자 겸 간사노릇을 했다는 그 한 가지로도 이날 밤의 기념회는 호화롭고도 남았다.
축전을 보낸 이들 중에는 경도제대의 「신무라·이즈루」(후에 광사원의 편자)교수 이름도 있었다. 『조선 문화에 한걸음 가까와진 것을 기뻐한다.』그런 전문이었다.
향토 연구사를 경영하던 「오까무라·지아끼」씨가 「테이블·스피치」를 하면서 『김군은 오늘 저녁 누구의 옷을 빌어 입은 것인지 의젓한 신사차림입니다만….』
그러고는 목이 메어서 더 말을 잇지 못하고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그만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빌어 입은 양복을 알아맞힌 데는 할말이 없었지만 내게 그분이 그토록 관심을 기울여 주었다는 데는 고마움보다도 놀라움이 더 클 밖에 없었다.
강촌씨와는 그전에 두어번 민요 집의 출판을 두고 만난 일이 있을 뿐, 사사로운 인연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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