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1) 경기 80년-제71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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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해방이후 6·25가 일어나기까지 과도기적 기간동안 경기는 혼란 속에서도 꾸준히 성정을 계속했다. 좌·우익의 싸움과 복합적으로 얽힌 교장 배척운동 등 어려운 고비가 많았지만 인내와 저력으로 난관을 헤쳐 나간 것이다. 혼란 속에서도 과외활동은 활발해 「스포츠」는 물론 문학·미술·음악 등 문예부문의 활동은 다른 학교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교내 문예활동은 교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이 기간동안 교지 난립기를 겪었다.
일제가 물러나고 서투른 우리말을 구사하게되자 경기문학은 기치를 들었다. 7개의 교지가 부침을 계속했는데 청탑을 효시로 일섭단·홍현·경기지광·경기문단·경기학보·문예경기 등이다. 이중 49년 1월 발간된 7번째 교지인 문예경기는 사륙배판 36면으로 내용은 고사하고 산뜻한 인쇄와 혁신적 편집이 시중의 출판물을 압도하여 이채를 띠었다. 창작·수필·시 등이 풍부했고 신랄한 「가십」난·설문난 등은 해방 후 읽을거리에 굶주린 학생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창간호는 3천부를 찍었는데 교외에서 1천5백부나 팔려 서울시내 중등학교 공통의 문예지역할까지 하게되어 2호부터는 타교생의 투고도 받았다. 문예경기는 10호가 발행됐을 때 숙명여고생 박옥희의 투고시『밤의 노래』가 말썽을 빚기도 했다. 『이승 만상과 함께, 마지막 햇빛은 쓰려지고, 벙어리 된 조상들의 눈물겨운 인종을 보노니』. 이 시의 첫 구절인 『이승 만상」이 「이승만상」으로 당국에 의해 해석된 것이다. 결국 이원혁 지도교사가 견책을 당한 것으로 일단락 지어졌으나 이후 타교생의 투고는 금지되었다.
또 음악에 있어서 나팔대가 해방 전부터 7, 8인의 대원으로 명맥을 유지해왔다. 이 나팔대를 모체로 「경기취주악단」이 발족된 것이 해방직후인 45년 10월께다. 취주악단은 학도호국단이 발족된 48년 말부터 더욱 발전하여 김종무 교장이 부임한 후에는 42인 조의 대 취주악단이 조직되어 중학생의 교내악단의 수준을 넘어서 50년초 명동 시 공관에서「베토벤」의 운명교향곡을 연주함으로써 갈채를 받았다.
또 합창단은 해방 전부터 조직되어 있었으며 경음악단마저 해방 후 만들어져 「바이올린」 「아코디언」 「하모니카」를 주축으로 2, 3년간 교내활동을 가졌다. 당시 작곡을 했던 백남준(47회)은 현재 「유럽」·미국 등지에서 전위음악의 대표적 인물이다.
미술부와 조각부는 47년께부터 활동을 시작했는데 이해 10월 화신백화점에서 제1회 경기미술전이 개최되었다. 이것은 해방 후 최초의 전국학교관계 미술전람회였다는 점에서 기록할만하다.
50년 6월에는 서울대학 주최 제1회 학생미술전람회에 대거 출품하여 단체상·특상 등을 획득했다. 이외에 기갑부가 있는데 해방 전부터 학교에 있던 구식「포드」승용차를 가지고 운전연습을 했다. 연주부는 48년 가을 교내 예술제에서 『카레의 시민』을 상연했으며 생물반·지질반·화학반 등이 이미 구성되어 있었다. 49년 여름 정부수립을 경축하여 거행된 전국남녀 중학생 영어웅변대회에서는 당시 5학년이던 김오승(46회)이 1등을 차지했으며 변론부도 활발하게 활동을 벌였다.
한편 50년 6월 1일 개학과 함께 새로 부임한 맹주천 교장은 나를 6학년1반 담임으로 임명했다. 나는 그동안 1∼3학년 담임을 하며 공민을 가르쳐왔는데 학생들간에 신망이 있다고 해서 갑자기 6학년 담임을 맡긴 것 같다. 47회 졸업생이 되는 6학년1반에는 염보현(현 경기도지사), 구본호(현 KDI부원장) , 이희일(전 농수산부장관), 이재설(전 체신부장관) 등이 있었는데 지금 사회각층에 크게 활약하고 있으며 6·25동란으로 곡절이 많아 교직생활 30년 동안 특히 이들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일요일인 6월 25일 북한의 공산괴뢰군이 남침을 개시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후에도 27일까지 수업이 계속되다 이날 2교시가 끝났을 때 무기휴교에 들어갔다. 28일 서울을 점령한 북괴군은 교사를 접수하여 공산분자들의 소굴로 만들었는데 적 치하의 3개월 동안 경기는 과거의 중요한 기록을 대부분 잃는 비운을 맞았다.
9월 28일 수복과 함께 학교는 다시 미군에 징발 당해 화동 근처 재동초등학교의 일부를 빌어 10월 16일 실로 4개월만에 개교를 했는데 교사 20명·학생 2백여명이 등교했다. 학생이 차차 늘어나 11월엔 다시 인사동에 있던 퐁덕초등학교로 옮겨 겨울방학도 없이 학업을 계속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참전과 함께 당국의 지시로 무기휴교조치가 내렸으며 다시 남행 길에 오르니 소위 「1·4후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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