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외국 공격에 무력한 출자총액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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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영국계 펀드인 크레스트 시큐리티스가 SK그룹의 모기업인 SK㈜의 지분 12.39%를 확보, 최대주주가 되면서 경영권을 위협할 수 있는 위치를 확보했다.

아직 적대적 인수.합병(M&A)의 움직임은 없지만, 크레스트는 마음만 먹으면 SK그룹의 경영 전반에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됐다. 자산 규모 47조원의 국내 3위 그룹의 경영권이 1천7백억원 남짓한 외국 펀드의 공격에 휘청거리는 현실은 한마디로 충격적이다.

이런 사태가 야기된 데는 무엇보다 정부의 재벌정책, 특히 출자총액제한 제도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현행 공정거래법은 재벌의 문어발식 경영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국내 대기업은 순자산의 25%를 넘는 다른 기업 출자에 대해 의결권을 제한하고 있다.

이 때문에 SK 계열사들이 SK㈜의 지분을 35.7%나 갖고 있지만, 실제 행사 가능한 지분은 10.8%선에 불과하다. 반면 외국 자본은 이 규제를 받지 않아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번 일은 제도상 맹점 때문에 국내 대기업들이 외국 자본의 적대적 M&A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앞으로 제2, 제3의 SK가 나오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따라서 차제에 출자총액제한 제도에 대한 전반적인 재검토와 보완이 필요하다.

문어발식 경영과 오너의 독단을 막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국내 대기업들이 줄줄이 헐값에 외국 자본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방치할 수는 없지 않은가.

설사 경영권은 지키더라도 몇년 전 외국계 헤지펀드가 SK그룹의 지분을 대거 매입, 경영에 간섭하다가 이를 그룹에 되팔아 막대한 시세차익을 남기고 떠난 것처럼 엄청난 국부 유출을 야기할 가능성도 있다.

국내 기업들이 회계.경영 등에서 글로벌 스탠더드(국제적 기준)를 갖춰야 하며, 대주주들도 경쟁력 차원에서 기업 경영의 투명성을 높여가야 한다. 그러나 세계 어디에도 없는 출자총액제한 제도 때문에 국내 대기업들이 경영권을 위협받는 역차별 역시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