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의 애환 어린 「굿판」재현|국립창극단의 『가로지기』공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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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40이 넘은 나이의 어른들이라면 대부분 어린 시절 고향의 흥겹던 굿판에 관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굿판은 동네사람들을 위한 신명나는 일종의 놀이판이었다. 특히 며칠씩 계속되던 추수후의 마을 부잣집의 재수굿이라도 벌어지면 동네사람들은 열일 제쳐놓고 굿거리판에 몰려들게 마련이다.
울긋불긋한 옷에 갓 쓴 어여쁜 무당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칼타기놀음을 구경할 수 있는 굿도, 지난봄 시집온 앞집 새댁의 신명나는 춤을 본 곳도, 일찍 홀로된 건너 마을 아주머니가 한 맺힌 설움이 통곡이 되어 터지던 곳도 굿판에서였다.
지금은 없어진 서민들의 축제였던 굿판을 오늘날에 재현하여 신명나고 흥겨운 놀이판을 만들어보자는 것이 창극 「가로지기」(변강쇠타령)를 이번에 공연케 된 의도라고 연출자 허규씨는 밝힌다(국립창극단공연· 7∼11일 국립극장 소극장).
요즈음 거리에서는 흔치않은 「파나마」모자 쓴 할아버지, 바지·저고리에 마고자를 떨쳐입은 아저씨들, 고무신 신은 할머니·아주머니들이 이웃굿판에 구경이라도 온 듯 느긋하고 한가로운 표정이다.
『여러분, 더러 굿만에 가보셨소?』횐 두루마기를 떨쳐입은 해설자 박후성씨는 이웃 사람에게라도 묻듯 스스럼없다. 『굿판에서 어쩌는지 모르면 「얼씨구」만 하세요. 「얼씨구」가 뭔지 아시요?』다시 묻자 『얼씨구 좋다요.』무대 앞자리에 앉은 한 할머니가 대답한다.
이어 고수(이준식)의 장고가 울리고 대금·아쟁·피리·해금이 신명나는 가락을 뽑으면서 굿판은 시작된다. 『옛날 옛적에 변강쇠란 천하 잡놈이 하나 있었는데…』『평안도의 한 계집 옹녀. 이년 화상을 볼 짝이면 복사꽃 같은 얼굴에 앵두 같은 입술. 세류 같은 허리….』
삼남의 천하 바람둥이 변강쇠와 상부살이 껴 7명의 남편이 죽고 찌들이가 된 옹녀의 사랑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는 비롯된다. 강쇠가 옹녀와 살림을 차린 후 장승을 패때고 동티나 죽고 이어 음녀 옹녀에게 마음이 있는 봉사·의원·중·초란이·새우젓 장수·각설이패 등과 가객·풍각장이·엿장수 등 다양한 떠돌이패의 희희닥거리는 삶이 시체를 치우는 과정에서 전개된다.
변강쇠의 한으로 시체를 치우려는 사람들이 땅에 달라붙어 움직이지 않자 떠돌이패의 익살스러운 몸짓과 말투, 나름대로의 독특한 재능이 관객을 시중 무대에 달라붙게(?) 한다. 특히 남사당패들의 간드러진 노래, 각설이패들의 구성진 각설이 타령은 떠돌이 천민들의 생활의 애환이 가슴에 와 닿게 하는 일품이었다. 무당의 푸닥거리로 땅에 달라붙었던 사람들이 떨어지고 가객의 선창으로 달구지 소리를 낼 때 막이 내렸다.
신명나는 현대의 굿판을 차려보겠다던 연출자의 의도는 일단 성공한 것 같다. 또한 노란 저고리에 받쳐입은 다홍치마자락을 휩싸안으며 궁둥이를 내흔들며 걷는 옹녀역의 남해성씨도 적역을 맡아 열연했다.
신재효의 판소리정리로 가사만이 남은 것을 허규씨가 각본을 쓰고 박귀희씨가 작창한 『가로 가는 사람』『비정상적인 죽음』을 뜻한다는 『가로지기』는 일단 매우 비극적인 내용을 희극적이고 떠들썩한 표현방법으로 처리한 우리겨레의 소중한 삶의 지혜를 무대에 재현하여 「재미있는 극」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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