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님의 침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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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독립선언서에 33인이 서명할때까지는 조금도 순탄하지 않았다. 누구 이름을 먼저 쓰느냐는 것부터가 시빗거리였다.
『…나는 하는 수없이 그러면 이 순간까지 서로 노력해온 일 그만 파의할 수밖에 없다고 강경한 태도로 임하게 되었는데…』-.
최린은 이렇게 『자서전』에서 술회하였다.
독립선언서라 이름 붙이기까지에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일부에서는 「독립청원서」라고 부드럽게 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자치권 정도만이라도 얻게되면 좋지 않으냐는 것이었다. 독립할만한 실질적 조건을 갖추고 있지 못한 형편인데 독립선언은 너무하쟎느냐는 얘기도 나왔던 모양이다.
어느 대표는 또 서명하기를 매우 꺼리기도 했다. 연락을 하기가 어려울 만큼 먼 시골에 파묻혀 있던 대표도 있었다.
이런 어려움을 헤쳐나가며 독립선언서의 낭독에까지 이르게 한데에는 실로 한용운의 힘이 제일 컸다.
그는 일본의 총독제하의 자치가 어찌 독립과 같을 수 있겠느냐고 역설했다.
『국가는 모든 물질적 조건이 완전히 구비된 후라야 꼭 독립하는 것은 아니다. 독립할만한 자존의 기운과 정신적 준비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이리하여 독립선언서라고 이름 붙게 된 것이다.
그는 선언문의 기초까지도 자제하였다. 결국 이를 양보한 것은 최남선의 문재가 자기보다 뛰어나다고 여긴 탓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내용의 일부가 미흡하다하여 수정을 가했다. 필두서명을 주창한 것도 그였다.
서명을 꺼린 어느 대표에게는 끝내 거부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위협하기도 하였다.
독립운동에 앞장섰다가 굽힌 사람도 적지는 않았다.
일제에 잡힌 다음에 이른바 참회서나 굴복서를 쓰지 않은 사람이 만해 이외에 과연 몇이나 있었던가.
몇 년인가 뒤에 어느 변절한 대표 한 사람이 그를 찾아왔다. 그러자 만해는 없다고 따돌려 보내려했다. 그 사람이 하는 수없이 나가려 할 때에 만해는 일부러 안방에서 큰기침소리를 내며 자기가 있음을 알려주었다.
얼마나 그 변절한 대표는 부끄러웠을까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일을 일으키기는 쉽다. 그러나 자기 신념을 끝까지 지키고 그 신념에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도록 처신해나간다는 것처럼 어려운 일은 없다. 올해로써 우리는 만해 한용운의 탄신백주년을 맞는다. 그리고 이를 기념하는 여러 가지 행사가 베풀어진다.
그러나 조금도 부끄러운 마음이 없이 그를 기릴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 것인가. 그저 송구스러울 뿐이다. 그리고 그는 이전에 노래했던 것처럼 지금도 침묵하고 있다. 우리에게 할말도 많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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