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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도 표를" 뿔난 아이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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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연
이규연 기자 중앙일보 탐사기획국장
이규연
논설위원

“아빠네 신문은 왜 거짓말만 해. 정부가 시신 찾아놓고도 한동안 인양 안 하고 있었다던데. 밤에 조명탄도 몇 발밖에 안 쏘고… .”

 한 일간지 정치부장은 여고생인 딸에게 불신이 깔린 항의를 자주 받는다고 한다. “자기만 살겠다고 각자도생한 어른에 대한 불신의 단면”이라고 그는 본다. 자신이 친정부 성향이 아님을 전제한 뒤 헛소문임을 차근차근 설명해줘도 도무지 믿지 않는 눈치라고 한다. “아내까지 동조해 합동 공격을 하고 있다”고 그는 덧붙였다.

 서울시청 앞 세월호 분향소. 1시간가량 분향 광경을 지켜봤다. 그 사이에 다녀간 시민은 3000여 명. 5명 중 3명이 여성이었다. 연령별로는 40대와 10대가 가장 많았다. 분향을 마친 한 무리의 여고생을 만나 얘기를 들어봤다.

 “정치인의 말을 어떻게 믿겠나. TV도, 한 방송사를 빼고 거짓말을 한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일부 ‘앵그리키즈’는 감정과 말만이 아닌 행동에 나섰다. 최근 광화문광장 이순신동상 앞에서 20여 명이 모여 청소년의 정치적 권리를 선언했다. 선언문의 주요 내용은 이랬다. ‘학생은 교육정책의 직접적인 당사자임에도 교육감을 뽑을 수 없다 … 가라앉는 배를 바라보며, 돌아오지 못한 희생자와 그 유가족을 바라보며, 생사 결정을 하는 것이 정치임을 뼈저리게 느꼈다 … 더 이상은 가만히 있을 수 없다 … 9일간의 투표를 통해 청소년도 직접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음을 보여주겠다’.

 이에 선거관리위원회는 전례가 거의 없는 사안이라 고민하는 모습이다. 서울시 선거관리위원회 한 직원은 “모의 투표 결과를 선거 전에 공표하지 않는다면 일단 공직선거법을 위반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 이후 무수한 여론조사가 발표됐다. 모든 여론조사는 ‘40대 여성’에 주목한다. 청소년 자녀를 둔 이들이 정부·여당 지지를 철회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더 뿔이 나 있는 계층은 그 엄마의 딸과 아들이다. 한 언론사가 세월호 참사 이후 유일하게 청소년의 민심을 조사했다. 청소년 10명 중 8명은 정부 대응책이 적절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10명 중 7명은 비슷한 사고가 나더라도 정부가 적절히 대응하지 못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10명 중 4명은 “이민을 떠나고 싶다”고도 했다. 어른 세대에 비해 더 비판적이다.

 미래세대의 사회 불신과 현실참여 요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우리보다 앞서 이런 고민을 한 나라들은 미래세대의 입장을 반영한 정치적 장치를 만들어 놓고 있다. 헌법에 미래세대를 위한 현 세대의 책무를 명시한 국가들이 있다. ‘세대 간 형평성을 유지하기 위해 국가의 채무 한계를 정한다’(독일), ‘우리의 문화유산을 미래세대에 물려줄 의무가 있다’(폴란드), “현재와 미래세대의 이익을 위해 자연환경을 보전해야 한다’(남아공) 등이다.

 더 적극적으로 의회에 상임위원회를 구성해 놓은 나라도 적지 않다. 핀란드는 세계 최초로 정부와 협의를 거쳐 미래전략을 수립하는 미래상임위원회를 의회에 설치했다. 이스라엘과 헝가리는 현세대의 탐욕에서 미래세대를 지켜내기 위해 미래세대위원회를 두었다. 이들 나라가 미래세대의 권익에 주목하는 것은 국가가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로 사회의 불신이 가득한 지금, 미래세대의 입장을 대변할 정치기구의 설치를 논의할 만하다.

 미래세대는 TV 생방송을 통해 동년배가 희생되는 광경을 지켜봤다. 감수성이 예민한 이들의 마음 속에 집단 트라우마가 생겨났다. 이런 마음이 ‘각자도생’ 세대를 구축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불신지옥’이 된다. 바람이 오기 전에 흔들리는 풀처럼 어린 마음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불신의 태풍이 진격해 오기 전에 방벽을 세워야 한다.

이규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