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의 평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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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교수재임명을 위한 연구실적평가에서 모대학에서는「문학」을 제외했다하여 20여명의 교수들이 이의를 제기했다한다.
알려진 바로는 같은 예술활동 중에서도 음악교수들의 연주활동과 미술교수의 개인전은 연구실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모양이다.
교수의 자격평가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연구실적평가처럼 어려운 것도 없다.
아무리 l년에 서너편씩의 논문을 내놓아도 10년에 한번 내놓은 논문보다 못하는 경우도 많다.「막스·베버」도 몇해동안 단 한편의 논문도 내지 않은 경우가 있다.「슘페터」와 같은 대경제학자도 마찬가지다.
미국대학에서는 수기를 세 가지로 분류해놓고 있다. 하나는 지식전달의「데크니션」으로서의 교수다. 이들에게 있어서는 원칙적으로 연구실적이 문제되지 않는다.
또 하나는 연구를 위주로 하는 교수들이다. 이들은 주로 대학원에 적을 두고있다.「프린스턴」대학에 있었을 때의「아인슈타인」에게는 전혀 강의의 의무가 없었다.세번째로는 객원교수들이 있다. 「아이오와」주립대에 있었을 때의 「포크너」의 위치가 그것이었다.
그는 강의보다는 학생들의 창작활동을 지지했다. 여기 속하는 교수들도 연구교수와 마찬가지로 강의의 의무는 거의 없다. 원래가 교육자는 아닌 것이다.
이렇게 미국의 대학은 매우 합리적이다. 대학이란 우선 지식전달의 장소이다. 그래서 교육의「데크니션」이 필요하다.
동시에 대학은 진리의 전당이다. 이래서 연구자들이 필요하다. 아울러서 학생들에게 학문과 학술에 대한 자극을 불어넣어 주어야한다.
이래서 미국대학에서는 세계적인 기술의 거성들을 오수로 곧잘 모신다.
「미아티고르스키」도 대학에서 「첼로」를 가르치지 않으면서도 음악교수의 자리에 앉아있었다.「옥스퍼드」대학에는 「시학교수」라는 자리가 있다.
「매듀·아널드」「오든」「그레이브즈」등 세계적인 시인들이 그 자리를 이어나갔다.
이들은 꼭 한 강좌밖에 맡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의 교수로서의 권위는 학원밖에서의 시작생활에 의한 것이었다.
우리나라 대학에서는 그렇지가 못하다. 교수란 교육의 「테크니션」인 동시에 연구교수여야 한다. 그런가 하면 한국의 「포크너」는 대학엔 발붙일 수 없게 되어있다.
물론「하버드」대학의 고전문학조교수「시갈」이 『러브스토리』를 발표한 다음에 대학에 더 머물러있기가 거북스러워진 예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러브·스토리』가 대중소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대학측이 본 때문이었다.
또한 훌륭한 보가인 동시에 훌륭한 대학교수가 된 예는 미국에서도 없다. 음악·미술활동은 인정되면서 문학만은 제외된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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