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의 새 국방상 섭검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중공 국방상에 임명된 섭검영은 중공을 실제적으로 지배하는 21인 당정치국의 서열5위이며 중공 군원수 10명중 한 사람. 문화혁명 기간 중 거세되어 중공 정치 무대에서 자취를 감추었다가 1969년 복권된 후 당정치국 위원으로 재선되었고 1973년 8월의 중공 당십전대회에서 5인의 당 부주석 가운데 한사람으로 임명됐다.
광동성 매현 출생인 그는 운남군관학교를 20세의 나이로 졸업한 후 복건성 지방군에서 얼마동안 복무하다가 주은내 수상 소개로 황포군관학교 교관이 되었고, 이때부터 섭과 주는 절친한 친교를 맺게 되었다.
1927년 섭은 주은내가 주동한 남창 봉기에 참여했다가 이 봉기가 실패로 돌아가자 이들 두 사람은 「홍콩」으로 몸을 피했다.,
1929년 그는 소련에 유학, 약3년간 군사학을 공부했다. 이때쯤 그가 또 「파리」에서 예술 공부를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중국에 돌아온 후 그는 1934∼1935년까지 모택동의 이른바 대장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1945년 전쟁 중의 수도 중경에서 열렸던 국공 평화 회담에 모택동을 수행하여 국민당 정부와의 화해 협상에 참여했다.
섭은 문혁 기간 중 좌파 비평자들의 비난의 목표가 되었으나 주은내의 도움으로 다시 정계에 복귀, 1969년4월 정치국 상임위원으로 재선되었고 임표가 사라진 후 출세 가도를 줄달음쳐 왔다. 【로이터】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