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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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그는 언젠가 자신의 수명에 관해 글을 쓴 일이 있었다. 10대 후반의 소년시절에 벌써 그는 기껏해야 27∼28세면 죽을 것이라는 예감을 갖고 있었다. 아니, 그 만큼 살면 꽤 오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 때가 일본에서 중학교를 다닐 무렵이었다고 한다.
그는 몸이 말할 수 없이 쇠약해 있었다. 목덜미는 머리를 지탱하기조차 힘겨웠다. 다리도 쉽게 균형을 맞출 수가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면『용케 연명했구나』하고 혼자 중얼거렸다고 한다.
무슨 병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시대의 어둡고 무거운 혈 류가 자신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한다. 정말 사는 재미가 없었던 것 같다.
한 시대의 배경, 또 그 사회의 분위기는 인간의 생존에 얼마나 중요한 조건인가를 절감할 수 있게 한다. 실로 인간은 정신적인 동물임을 새삼 일깨워 준다. 그는 한때 자살까지 하리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한다.
때마침 일본에선 관동대지진이 일어났다. 1923년, 그는 아직 19세의 소년이었다. 일본에서의 한인대학살사건이 벌어진 것도 이 때이다. 북해 도에서 구주에 이르기까지 한인들은 닥치는 대로 죽음을 당했다. 이 공포의 계절을 겪으면서 그는 마음속으로 결심을 했다. 내가 살아 남는다면 문학을 하리라. 문학을 할 바에야 시나 소설보다 행동예술인 연극을 하리라고 마음먹었다. 비로소 그는 자살에의 충동도, 절망도 모두 벗어날 수 있었다.
오늘의 유치진씨는 그래서 연극인이 되었다. 이제 그의 부음을 들으면서 오륜을 헤아려 븐다. 고희의 초인인 향년 69세. 그는 자신의 예감을 두 곱절도 넘게 여 년을 누렸으며, 또 연극으로 반세기의 보람을 쌓았다.
그는 1931년 일본의 유학을 마치고 귀국, 줄곧 연극인의 생활을 했다. 『버드나무 선 동리의 풍경』, 『소』등 한때 민족의 어두움을 그린「리얼리즘」의 작품들을 쓰기도 했다. 창작뿐 아니라 연출과 출연도 함께 했다.
1940년대는 일제의 식민정치가 더욱 신랄해 갔다. 한때 자살까지도 결행하려던 유치진씨마저 그 시대에 동조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은 얼마나 암담했던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지금 서울 남산 중턱의「드라마·센터」는 유치진씨의 고심참담 위에 세워진 연극인의 집이다. 당시 외국 어느 재단의 도움으로 집을 세우긴 했지만 관객용 의자가 없어 그는 동분서주했었다. 그의 이런 노력이 없었던들 우리는 연극전용의 무대를 갖기란 어려웠을 것 같다.
무엇인가 남기고 이 세상을 떠나기란 그리 쉬운 노릇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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