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 쓰나미" 서유럽 비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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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이민자 유입 ‘공포’가 신년 벽두 서유럽 국가에 들이닥쳤다. 1일부터 서유럽 9개국에서 불가리아인과 루마니아인에 대한 취업 제한이 풀렸기 때문이다. 영국의 대중지들은 당장 무더기 이주 사태가 빚어질 것처럼 요란하게 보도하고 있다.

 불가리아와 루마니아는 2007년 유럽연합(EU)에 가입해 국민의 EU 내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받았다. 이로써 사전에 비자를 받지 않고서도 EU 국가들에서의 체류가 가능해졌다. 하지만 영국·독일·프랑스·네덜란드 등 서유럽 9개국은 노동 시장 안정을 이유로 7년 동안 두 나라 이주민의 취업에 제한을 뒀다. 전문 기술직에 대한 사전 취업 허가서를 받지 않고서는 장기 체류가 불가능하도록 만든 것이다. 이 제한이 1일부터 풀렸다.

 영국 일간지 데일리메일은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에서 런던으로 가는 항공편이 9일까지 예약이 꽉 찼다고 1일 보도했다. 영국까지 20여 시간에 걸쳐 달리는 버스에도 승객들이 몰리고 있다고 전했다. 영국에서 이민자 규제 강화를 요구하는 시민단체는 올해부터 한 해에 약 5만 명의 불가리아인과 루마니아인이 영국으로 유입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서유럽 9개국에선 이 사안이 수개월 전부터 주요 현안으로 다뤄졌다. 영국에서는 하원의원 60명이 취업 규제 연장 조치를 추진했으나 EU 이민법이라는 벽에 부닥쳐 실현되지 못했다. 영국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독일과 프랑스에 공동 대책을 강구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로마인(집시의 국제기구 공식 호칭) 유입에 대한 우려가 제기됐다. 루마니아는 로마인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나라다.

 특히 영국이 민감한 이유는 2004년 폴란드의 EU 가입 뒤 영국에 100만 명에 육박하는 이 나라 이민자가 몰렸기 때문이다. 취업 기회가 많은 대도시에 일단 발을 들여놓는 이주민의 속성상 유럽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인 런던에 이주자가 쏟아져 들어왔다. 당시 영국은 폴란드 이주민이 2만 명 이하일 것으로 예측했다가 곤욕을 치렀다.

 서유럽 국가들은 불가리아인과 루마니아인이 취업보다는 사회보장의 혜택을 노리고 이주해 올 것을 걱정하고 있다. 이 때문에 영국에선 최근 이주 3개월 내에는 이주민이 자녀 양육수당이나 주거 지원금을 신청할 수 없도록 규정을 고쳤다. 영국 정부가 이처럼 노골적으로 이민자 유입 차단 정책을 내놓자 루마니아의 정부 대변인은 “영국은 우리 국민이 그다지 살고 싶어하는 나라가 아니다”며 불편한 심기를 표출했다.

 동유럽 이주민 문제는 5월에 실시되는 유럽의회 선거판을 달구는 이슈가 될 전망이다. 영국의 독립당(UKIP)과 프랑스의 국민전선(FN) 등 극우 정당들은 유권자들의 불안감을 자극하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유럽의회에서 이민자 규제 강화를 주장하는 정당들이 25% 이상의 의석을 차지할 것으로 예측했다.

런던=이상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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