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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꿈, 충돌하는 두 개의 일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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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서승욱
도쿄특파원

명승부였다. 한국시리즈만큼이나 일본시리즈도 격전이었다. 3일 약체 구단 ‘도호쿠(東北) 라쿠텐 골든이글스’가 도쿄의 최고 인기 구단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7차전에서 무너뜨렸다. 창단 9년 만의 첫 정상이다. 사실 한국시리즈는 누가 이겨도 드라마였다. 1승3패에서 시리즈를 뒤집은 삼성이나 정규리그 4위로 대이변의 주인공이 될 뻔한 두산 모두 ‘미러클’이었다. 하지만 일본시리즈는 라쿠텐 쪽으로 드라마적 무게감이 확 쏠렸다. 미야기현 센다이가 거점으로, 대지진·원전사고 피해지역인 도호쿠를 대표하는 구단이라는 상징성 때문이다. 160개의 공을 던진 뒤 다음 날 또 등판한 에이스의 역투, 40여 년의 프로야구 선수·감독 인생에서 첫 우승을 맛본 호시노 센이치(66) 감독의 얘기도 화제였지만 일본 언론들이 더 주목한 건 도호쿠에 전하는 메시지였다. “도호쿠를 뜨겁게 달구겠다”고 출사표를 던진 감독은 시리즈 내내 “고교 시절의 투혼으로 뛰어달라”며 선수들을 독려했다. 우승 확정 뒤엔 “도호쿠에 용기를 준 선수들을 칭찬해달라. 재해에 시달리는 이들을 치유해주고 싶어 감독 취임 이후 3년을 싸워왔다”고 했다. 빠른 원전사고 수습과 부흥이란 ‘도호쿠의 꿈’에 용기를 준 시리즈, 라쿠텐은 절망과 씨름하는 이들에게 한 줄기 빛을 던졌다.

 하지만 야구장을 벗어난 도호쿠의 현실은 녹록지 않다. 자민당의 2인자인 이시바 시게루 간사장은 2일 한 강연에서 “‘이 지역에선 주민이 살 수 없다. 그 대신 수당을 주겠다’고 언젠가 누군가는 말해야 하는 시기가 온다”고 했다. ‘희망자 전원 귀환’이란 정부의 원전 주변지역 대책 기조를 이제는 뒤집어야 하며, 언젠가는 솔직한 본심을 주민들에게 털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9월 중순 ‘원전사고 2년6개월 기획’을 위해 방문했던 후쿠시마 제1원전 주변은 참담하기만 했다. 폐허가 된 마을을 장악한 야생 원숭이와 차 안으로 정신없이 밀려드는 엄청난 수치의 방사능, 원전이 지긋지긋하다는 주민들의 절규만 기자의 기억에 남아 있다.

 일본이 감당하지 못하는 오염수 유출은 전 세계를 공포 속에 밀어넣고 있다. 이런 비극은 아베 신조 총리의 정치적 스승이자 총리 재임 시 원전추진론자였던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까지 ‘원전 제로 전도사’로 돌려세웠다. 아베의 부인 아키에 여사도 “원전 가동에 쓰는 돈의 일부를 새 에너지 개발에 쓰고, (그렇게 만들어진) 그린 에너지를 해외에 팔자”며 공개적으로 원전에 반대한다. 하지만 원전론자인 아베는 지난달 말 터키를 방문해 원전 수주를 성사시켰고, 국내 원전 재가동에도 적극적이다. 아베노믹스의 성장전략에서 원전을 빼놓을 수 없다는 신념 때문이다. “자기 나라의 사고는 수습도 못 하면서 해외에 원전을 잘도 팔고 있다”는 후쿠시마의 분노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도호쿠의 꿈과 아베의 꿈, 두 개의 다른 꿈이 충돌하고 있다.

서승욱 도쿄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