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영희의 사소한 취향

무한경쟁의 세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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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지난여름, 샐러리맨의 일상을 그린 윤태호 작가의 만화 ‘미생’이 모바일 영화로 만들어졌다. 88만원 세대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주인공 장그래 역할에 아이돌 그룹 ‘제국의 아이들’ 멤버 임시완이 캐스팅되면서 논란이 일었다. “아이돌이 요즘 20대의 깊은 좌절과 상실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겠느냐”는 우려였다. 당시 임시완이 웹진 ‘텐 아시아’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남들보다 좀 특이한 직업을 가졌을 뿐 나도 회사원들과 크게 다른 것 같진 않다. 수습사원처럼 열심히 연습생 생활을 거쳤고 지금도 조직생활을 하고 있다.”

 음악채널 엠넷에서 방영 중인 ‘윈:후 이즈 넥스트(WIN:Who Is Next)’라는 프로그램을 보며 ‘과연 그렇군’ 했다. ‘윈’은 ‘빅뱅’과 ‘투애니원(2NE1)’ 등을 배출한 기획사 YG엔터테인먼트에서 새롭게 데뷔할 그룹을 결정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다. 이미 몇 년간 연습생 생활을 거친 아이들을 20대 초반의 A팀, 10대 후반의 B팀으로 나눠 경쟁시킨다. 세 번에 걸친 시청자 투표에서 이긴 한 팀만 데뷔 기회를 갖게 되는데, 데뷔할 팀 이름은 아예 ‘위너(Winner·승리자)’다.

아이돌 서바이벌 ‘윈(WIN)’. [사진 Mnet]

 이들의 모습은 ‘절반만 채용’이란 전제 하에 업무 테스트를 받는 인턴사원들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취업 준비생들이 회사가 원하는 스펙 쌓기에 목숨을 걸 듯, 이들은 데뷔라는 한 가지 목표를 위해 아이돌에게 요구되는 각종 스펙을 갖췄다. 외모도, 춤도, 노래 실력도 넘칠 정도로 충분한데 “데뷔 못하면 군대”라는 현실의 제약 앞에서 새벽까지 음악을 만들고, 춤을 추고, 불안함에 자주 눈물을 보인다. 이들의 멋진 공연에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론 안쓰럽기 그지없다. 특히 지쳐 쓰러지기 직전의 아이들에게 자꾸 “즐기라”고 조언하는 사람들이 얄밉다. “자, 현실을 맘껏 즐겨. 대신 지면 끝이란다”라니, 이건 너무 잔인하잖아.

 물론 대형 기획사의 연습생이란 것만으로도 수많은 아이돌 지망생보다 앞선 라인에 서 있다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꿈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지난주 첫 번째 대결이 끝나고 진행된 1차 시청자 투표에서는 A팀이 근소한 차로 승리했다고 한다. 나 역시 A팀에 수줍은 한 표를 던졌다. 이유는 단 하나. 뛰어난 실력으로 무장한(게다가 즐길 줄도 아는) 동생들에게 겁을 먹은 ‘올드 보이’ A팀에 동병상련을 느껴서다. 그렇게 인생은 또 스펙으로만 결정되는 건 아니더라, 그러니 한번 해볼 만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 과연 위로가 될지 모르겠으나.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