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러 파워게임 벌이는 사이 … 시리아 시민만 당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8면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의 유엔 사무소 앞에서 21일(현지시간) 시리아 화학무기 공격에 희생된 민간인을 애도하는 촛불 추모식이 열렸다. 시민들이 숨진 어린이들의 사진을 들고 추모하고 있다. [베이루트 로이터=뉴스1]

21일(현지시간) 시리아에서 화학무기 공격으로 최대 1300명이 희생됐다는 주장이 제기된 뒤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안전보장이사회 긴급회의에서는 2년5개월째 반복되는 광경이 재연됐다. 미국과 영국은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 압박을 주장했지만 러시아와 중국은 여지없이 이를 거부했다. 결국 나온 안보리 성명은 “명확한 조사가 필요하다”는 게 전부였다.

 미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FP)에 따르면 “회의에서 미국이 처음에 열람시킨 결의안 초안은 새롭게 화학무기 사용 주장이 제기된 지역에 유엔 조사단을 보내 추가로 조사할 권한을 주고 알아사드에게 제재를 가해 적극적 협조를 압박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와 중국의 반대로 밋밋한 성명이 나오는 데 그쳤다는 것이다.

 이는 희생자가 10만 명을 넘은 시리아 내전에 아무 대처를 하지 못하고 있는 국제사회의 무기력함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양대 키플레이어인 미국과 러시아는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서로 비판만 할 뿐 사태를 해결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듯하다. FP가 “오바마와 푸틴이 벌이는 신랄한 설전의 최대 패자는 바로 시리아 민간인”이라며 “양국의 옹졸한 정치적 대립에 시리아인들은 목숨으로 대가를 치르는 것”이라고 비판한 이유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스스로 그은 ‘레드 라인(금지선)’에 발이 묶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오바마는 지난해 시리아 정부군을 상대로 “화학무기 사용은 레드 라인을 넘는 것”이라고 직접 엄포를 놨다. 하지만 알아사드가 레드 라인을 넘은 지가 이미 한참 지났는데도 시민군에 대한 무기 지원 추진 말고는 딱히 이뤄진 조치가 없다.

 블룸버그통신은 “향후 시리아에서는 알아사드 정권이 힘을 유지하거나 시민군 연합에서 막강한 세를 떨치고 있는 알카에다 연계 세력 바잣 알누르사가 정권을 장악하는 두 가지 시나리오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두 가지 모두 미국의 이익에 반하기 때문에 오바마는 딜레마에 빠졌다”고 했다.

 알카에다 연계조직이 시리아에서 영향력을 키운 것도 미국이 사태 초반부터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않은 탓이 크다. 워싱턴포스트는 “시리아에 대한 개입은 이제 득보다 실이 많은 상황이 돼버렸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마틴 뎀프시 합참의장은 19일 하원의원에게 보낸 서한에서 “미국이 알아사드 정부를 직접 타격하면 전면전에 휘말릴 수 있다”고 우려했다.

 러시아는 국제사회에서 알아사드의 수호자 역할을 자처하며 모든 제재와 개입 조치에 반대, 사사건건 미국과 맞서고 있다. ‘내정 간섭 불가’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러시아가 내세우는 이유다. 하지만 속셈은 아랍권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러시아에 시리아는 전략적 요충이다. 사실 시리아로 수출하는 무기 양 자체는 상대적으로 많지 않고 시리아에 보유하고 있는 타라투스항에는 불과 소함정 몇 척이 정박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시리아는 사실상 유일한 러시아의 아랍권 동맹국인 데다 이 지역에서 미국 등 서방 세계와 맞서는 전진 기지나 마찬가지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으로선 시리아에 서구 국가들이 개입하는 것은 곧 아랍권 전체에서 영향력을 상실한다는 의미다.

 시리아 역시 러시아의 방호벽 없이는 국제 제재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푸틴의 허락 없이는 국제사회의 중재에 응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 최근 아랍권 언론들은 시리아 시민군을 구성하는 수니파의 맹주 사우디아라비아가 러시아에 시리아 정권을 포기하면 금전적 대가를 제공하겠다고 별도의 거래를 제안했다는 보도를 했는데, 이 역시 이런 러시아의 영향력을 의식한 조치다.

 알아사드 군은 22일 시민군이 장악하고 있는 다마스쿠스 외곽 지역과 시리아 북부 카분 지역을 폭격했다고 로이터통신 등이 보도했다. 특히 전날 야권에서 화학무기 공격을 받았다고 주장한 구타 지역도 다연장 로켓포와 중박격포 포탄 세례를 받았다고 시민 운동가들은 전했다. 야권은 “정부군이 구타 지역을 폭격한 것은 유엔 화학무기 조사단이 이곳을 방문하지 못하게 막으려는 것”이라고 비판하며 이를 증거 인멸 시도라고 주장했다.

워싱턴=박승희 특파원, 유지혜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