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 하벨대통령 '아름다운 퇴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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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대통령으로서 마지막 인사를 드리지만 앞으로는 동료 시민으로서 여러분과 함께 할 것이다."

13년 전 '벨벳 혁명(무혈혁명)'을 통해 공산체제를 평화적으로 붕괴시킨 반체제 극작가 출신의 바츨라프 하벨(66) 체코공화국 대통령. 그는 '철인(哲人) 대통령''동구의 만델라' 등으로 불린 명성에 걸맞지 않게 5분간의 짧은 퇴임 연설을 남기고 2일 프라하성 대통령궁을 떠났다.

하벨은 연설에서 "재임 기간 중 국내와 유럽 및 전세계에서 일어난 수많은 사건의 목격자였으며 당사자였다"고 회고하면서 "이 사건들을 운명이 부여한 위대한 선물로 간주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자신을 지지해준 국민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으며, 반대파들에겐 "그동안 저지른 잘못을 너그럽게 용서해주길 바란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하벨은 평생 자신이 꿈꿔온 민주주의의 실현에 헌신했다. "정치의 목표는 단순하다. 사람의 사람에 대한 존경을 증진하는 것이다"라는 그의 주장은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1989년 무혈 혁명을 통해 대통령이 된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사회주의 치하에서 압제의 상징이던 대통령 궁을 일반에 개방한 것이다. 궁을 지키는 수비병들의 카키색 제복도 밝은 청색으로 바꾸도록 했다.

하벨은 93년 하나의 연방이던 나라가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되면서 한때 위기를 겪기도 했다. 양 공화국의 분리는 '벨벳 이혼'으로 불릴 만큼 평화적으로 이뤄졌으나 분리에 반대했던 하벨은 이 사건에 기민하게 대처하지 못했다며 스스로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하지만 체코 국민은 그를 분리된 체코의 초대 대통령으로 뽑아 그에 대한 신뢰를 재확인했다.

하벨은 체코가 서구 유럽의 일원으로 자리잡는데도 큰 공헌을 했다. 체코는 99년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에 가입했고, 2004년에는 유럽연합(EU) 회원국이 된다.

그러나 최근 들어 하벨은 이상주의에 매달려 일반 국민으로부터 점점 유리되고 있다는 비판도 받았다. 일부에서는 의전적인 자리인 대통령의 한계를 넘어 일상적인 정치문제들에 개입했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후계자를 키우지 않아 그가 떠난 뒤 리더십의 공백이 우려되고 있기도 하다. 간접 선거를 실시하는 체코 의회는 지난달 새 대통령을 뽑는데 실패했다. 신임 대통령이 선출될 때까지 블라디미르 슈피들라 총리와 룸보미르 차오랄레크 하원의장이 공동으로 대통령직을 맡는다.

하벨은 퇴임 후 작가라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자신의 값비싼 경험을 국민에게 되돌려줄 것으로 전해졌다.

유철종 기자 <cjyou@joongang.co.kr>

<체코 하벨 대통령 주요 일지>

▶1936년 프라하 사업가 집안에서 출생

▶57년 체코기술대 경제학과 졸업

▶66년 프라하 행위예술 아카데미 졸업

▶68년 '프라하의 봄' 때 공산체제 저항운동

▶77~89년 반체제 운동으로 수차례 투옥

▶89년 벨벳 혁명 주도

▶90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

▶92년 체코.슬로바키아 분리 책임으로 대통령직 사임

▶98년 대통령 재선

<사진 설명 전문>
바츨라프 하벨 체코 대통령이 2일 수도 프라하의 세인트 비터스 성당에서 미사를 마치고 부인과 함께 걸어나오고 있다. 하벨 대통령은 이날 고별 연설과 함께 본업인 극작가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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