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재미동포 김사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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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사철(金思哲.68.미국 캘리포니아주 오렌지카운티)씨는 매일 저녁 집에서 가부좌를 틀고 명상에 잠긴다.

번뇌의 세계를 떠나 고타마 싯다르타(부처) 연구에 몰입한 지 10년. 눈을 감으면 마음 한 틈으로 야쿠자에서 정상의 과학자, 그리고 불자(佛子)로 이어져 온 다양한 삶이 스쳐 지나간다.

경남 마산에서 태어난 그의 인생은 경기중 1학년때 일어난 한국전쟁으로 뒤틀리기 시작했다. 아들이 군에 징집되는 것을 막으려던 아버지는 그에게 일본 밀항을 권했다. 그러나 도쿄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아버지 지인(知人)의 손찌검과 머슴같은 생활.

결국 그는 신주쿠(新宿)로 흘러들어 3년 만에 야쿠자 조직원이 됐다. 하지만 몸집이 작은 그에겐 힘든 생활이었다.

"매일 피떡이 되도록 얻어맞으면서 살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습니다. 당시 제 모습은 상처 입은 짐승과 같았지요."

그러나 행운이 찾아왔다. 포장마차에서 알게 된 한 도쿄대생의 도움으로 그는 명문 고시가와 고교에 편입했고 55년엔 시바쿠라 공대에 들어갔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보게된 뮤지컬 영화 '오클라호마'에서 넓은 벌판과 지평선을 봤다. 그것이 계기가 돼 그는 미국행을 꿈꿨다.

김씨가 오클라호마주에 도착한 것은 59년 2월. 돈이 없어 대학 네곳을 전전하다 62년 샌프란시스코대 수학과에 정착했다. 거기서 뒤에 부인이 된 루이스를 만나고, 64년 1등으로 졸업하면서 인생역전은 시작됐다.

뉴멕시코 주립대에서 석.박사를 딴 뒤 73년 '방위산업의 캐딜락'이라고 꼽히던 휴즈사에 입사했다. 고속승진으로 8년 만에 '원로 과학자' 타이틀을 거머쥔 그는 인공지능개발 본부장(80년)이 됐다.

"수십명의 과학자를 거느리며 막대한 자금을 사용할 수 있는 자리에 올랐지만 '일 중독자'가 된 남편을 견디지 못해 아내가 이혼을 요구했습니다. 결국 평일에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지만 주말이면 술.도박.여자 등에 빠져 지내게 됐죠. 그러나 85년 시작한 한 프로젝트가 다시 제 인생을 바꿨습니다."

인공지능을 연구하면서 '안다'라는 개념을 정의하는 문제로 허우적거리는 그에게 한 동료가 "옛 인도인 고타마 싯다르타를 연구해보라"고 귀띔했다. 불교서적을 탐독했지만 개념은 손에 잡힐 듯 말듯 했다. 결국 고등수학을 이용해 연구를 마무리했다.

성공의 대가로 큰 상을 받았고 노벨 물리학상 후보가 됐다는 말도 들었다. 하지만 우연히 접한 불교가 그의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93년 그는 휴즈사에서 물러나와 불교 과학자가 됐다.

그가 최근 발견한 것은 '부처가 깨달은 뒤 열반(涅槃)에 이르기까지 펼친 가르침 가운데 팔정도(八正道)가 중심'이라는 것. 그는 현재 이 가르침을 '고귀한 여덟가지 길' 이라 부르며 이해하고 실천하는데 자신을 바치고 있다.

"부처는 신이 아니며 욕망과 고통에서 깨어난 고타마란 이름의 인간입니다. 극단적인 삶의 질곡이 저를 이 길로 들어서게 한 것 같습니다."

과학자와 타락한 인간의 굴레 모두를 내던진 그는 니르바나(열반)의 꿈을 꾸는 젊은 노옹(老翁)이었다.

로스앤젤레스=안성규 기자,

사진 박종근 기자 askm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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