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지원자 부모를 뽑자는 것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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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이상재
경제부문 기자

지난주 지방의 한 대학 교수로부터 e메일을 받았다. 굴지의 대기업이 얼굴 사진과 해외연수 경험, 부모 주소 등을 삭제해 ‘입사지원서 양식을 대폭 개선했다’는 기사를 반박하는 내용이었다. 요컨대 “학점과 어학점수·수상경력 등 이른바 ‘스펙’이 부족한 지원자, 특히 지방대생이 체험하는 ‘서류 장벽’은 여전히 높다”는 것이었다.

 올해 초 GS칼텍스에 입사한 한 새내기 사원은 “기업들이 입사 전형 때 너무 과도하게 개인 정보를 요구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서 취업 준비생의 목소리를 더 들어봤다. 부모의 학력과 재산 등을 묻는 항목에 거부감이 상당했다. 지원자들은 “나를 뽑겠다는 것인지 부모를 뽑겠다는 건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했다. 실제로 대기업과 금융회사 10여 곳의 입사지원서를 살펴봤더니 부모의 학력과 재산은 물론, 지원자의 거주 형태와 종교·혈액형·소셜네트워크서비스 주소까지 묻고 있었다. 이에 대해 해당 기업들은 대부분 “1980~90년대 만들어진 양식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한두 가지씩 추가한 것인데 지원자에게 부담이 될 줄 몰랐다”는 반응이었다. 심지어 채용 전문 회사의 한 임원조차 “많게는 1만 건 넘는 서류를 모두 검토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스펙에 근거해 1차 평가를 하고 품성·열정 같은 정성적 요소를 다음으로 보는 게 현실적으로 최선”이라고도 했다.

 물론 변화 시도가 없었던 건 아니다. 고용노동부는 2007년부터 학력과 어학점수·가족사항 등이 없는 ‘표준이력서’ 작성을 권고하고 있다. 민주 통합당 김광진 의원실은 공무원·공공기관 채용 때 표준이력서 제출을 법제화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다행히 기업들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최근 스펙보다 인성과 열정을 더 높게 평가하는 기업이 하나 둘 생기고 있다. 삼성은 집단 면접을 없앴고, SK는 전국 6개 도시를 다니면서 ‘끼와 열정’ 있는 인재를 뽑고 있다. 공기업들도 고졸과 경력직 등 다양한 인재를 끌어들이려는 입사 실험을 하고 있다. 하지만 스펙과 서류만으로 사람을 뽑는 채용 관행을 바꾸려면 훨씬 더 많은 기업이 동참해야 한다.

 구직자 역시 특정 대기업에만 몰릴 것이 아니라 ‘나와 궁합이 맞는 회사’를 찾아야 한다. 다수의 구직자들이 지원 회사의 이름만 바꿔 입사 동기와 포부 등을 ‘복사하기’와 ‘붙여넣기’로 쓰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럴 시간에 자신이 일하고 싶고 ‘나’를 키워줄 직장을 신중하게 찾는 것이 구직 성공 확률도 만족도도 훨씬 클 것이다. 그런 문화가 정착되면 어렵게 취업하고도 만족하지 못해 금세 다른 직장을 찾아 헤매는 ‘파랑새’들도 당연히 줄어들 것이다.

이 상 재 경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