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시연금 '광풍'에 적금 다찾아 가입했다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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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이모(67)씨는 지난달 초 한 시중은행에서 상속형 즉시연금 5000만원을 넣었다. 당시 은행 직원이 “다음 달(2월 15일)부터는 세제 혜택이 사라지니 서둘러 가입하는 게 좋다”고 권유했기 때문이다. 예금과 적금을 모두 찾아 즉시연금에 들었던 이씨는 “오늘(18일) 보험사에 연락해보니 2억원 이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비과세 혜택은 그대로라는 말을 듣고 허탈했다”고 말했다.

 ‘즉시연금 열풍’이 지나갔다. 15일 세법 개정안 시행령이 공포되면서 세금을 회피하려는 ‘머니 무브’도 일단락됐다. 하지만 금융시장의 후폭풍은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금융사의 무책임과 투자자의 무지가 여실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즉시연금 열풍은 지난해 8월 세제개편안에 비과세 혜택 축소 내용이 포함되면서 예고된 것이었다. 하지만 지난해 말 이후 이를 ‘광풍’으로 키운 건 금융사였다. 지난해 5월 1500억원에 불과했던 ‘빅3’ 보험사(삼성·한화·교보)의 가입액은 12월엔 1조1000억원을 넘어섰다. 올 들어서도 한도가 차기 전에 즉시연금에 가입하려는 사람들로 은행 창구는 북새통을 이뤘다. 그동안 10년 이상 유지하면 전액 비과세 혜택을 받을 수 있었지만, 이달 15일부터는 2억원 이하 만 비과세 혜택을 받는다는 게 이유였다.

 이 과정에서 금융사는 투자자의 불안심리를 한껏 자극했다. 작은 세제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600조~700조원에 달하는 ‘떠 있는 자금’을 자신들에게로 몰아오기 위한 전략이었다. 이 결과 투자할 곳을 찾지 못했던 상당수 개인이 구체적 내용도 확인하지 않고 ‘절판 마케팅’에 넘어갔다. 자산가만 그런 게 아니었다. 약간의 여윳돈이 있는 중산층이 오히려 더 적극적이었다.

 사실 2억원 이하 가입자는 이번 세제개편과 전혀 상관이 없다. 언제 가입하더라도 10년 이상만 유지하면 비과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엔 자산가보다 2억원 이하 가입자가 즉시연금 광풍의 진원지 역할을 했다. A생명보험사에 따르면 전체 즉시연금 판매건수 가운데 80% 이상이 2억원 이하 가입자였다. 이 보험사 관계자는 “자산가가 가입할 걸로 예상했는데 2억원 이하 가입자가 너무 많이 몰려 깜짝 놀랐다”며 “한국 금융 시스템의 잠재적 불안요인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평했다.

 방카슈랑스의 ‘폐해’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판매자’인 은행이 더 팔겠다는데 ‘제조자’인 보험사는 물건 내놓기를 꺼렸다. 가입자에게 시중금리보다 1~1.5%포인트 높은 공시이율을 보장해 주기가 부담이 됐기 때문이다. 지난해 8월부터 가입자가 몰리자 교보·미래에셋생명 등이 서둘러 은행 판매(방카슈랑스)를 중단했다. 교보생명 관계자는 “금융감독원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즉시연금의 공시이율이 4.1~4.4%가량 나온다”며 “요즘 저금리 시대라 자금을 운용할 곳도 마땅치 않은데 너무 많은 돈이 들어오면 운용에 큰 부담이 된다”고 말했다.

 ‘판매사’인 은행의 입장은 정반대였다. 한 건이라도 더 팔아 3.5% 안팎인 판매수수료를 챙기려고 드라이브를 걸었다. ‘2월까지가 마지막’이라는 ‘절판 마케팅’을 주도한 것도 은행이다. 조남희 금융소비자원 대표는 “고객에게 장기적으로 수익을 보장해줘야 하는 보험사는 신중할 수밖에 없지만 은행은 판매와 동시에 수수료를 챙기면 사실상 아무 책임이 없다”며 “즉시연금 소동은 ‘갑’의 위치에 있는 은행의 힘이 너무 강해져 생긴 후유증이기 때문에 은행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꼬집었다.

 광풍이 지나간 자리는 어떨까. 2억원 초과 즉시연금의 비과세 혜택이 사라진 첫날인 지난 15일 우리은행에서 팔린 즉시연금은 5건(총 2억6000만원)에 불과했다. 같은 달 4일엔 하루 500억원어치나 팔렸다. 금융권 관계자는 “특정 상품에 과도한 혜택을 주던 걸 없애는데 이런 소동을 겪었다”며 “저금리에 투자할 곳조차 없는 상황에선 이런 현상이 반복될 가능성이 크므로 정책 운영을 보다 신중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창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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