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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 양성은 너만 할 수 있다” 린뱌오에 군정대 맡긴 마오
소련에서 귀국 직후 마오쩌둥의 요청으로 기념사진을 남긴 린뱌오(오른쪽). 1942년 2월 22일 옌안. [사진 김명호] 1941년 12월 29일, 소련 군용기 한 대가 신장(新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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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뱌오 탐낸 스탈린 “소련 장군 15명과 바꿀 수 없나”
1 국공 내전 시절 전선에서 작전을 지휘하는 동북인민해방군 사령관 린뱌오(가운데). 오른쪽은 정치위원 뤄룽환(羅榮桓). 1948년 10월 14일 진저우(錦州). 2 학생들에게 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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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가 꼽은 황푸 최고 인재는 ‘전쟁 마귀’ 린뱌오
장정(長征)을 마친 린뱌오(앉아있는 사람 가운데 왼쪽에서 넷째)는 옌안의 홍군대학 교장에 취임했다. 앞줄 둘째가 홍군대학 교육위원회 주임과 정치위원을 겸한 마오쩌둥. 뒷줄 왼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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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의 옌안 공격 지시, 중공에 ‘중계방송’한 슝샹후이
1971년 11월, 차오관화(喬冠華·앞줄 왼쪽 첫째), 황화(黃華·앞줄 가운데) 등과 함께 중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유엔본부에 모습을 나타낸 슝샹후이(뒷줄 가운데). [사진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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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의 왕’ 후쭝난, 키 작아 황푸군관학교 쫓겨날 뻔
후쭝난이 20년간 따라다닌 예샤디(葉霞翟·왼쪽 첫째). 오른쪽 첫째는 전 주소련 대사 푸빙창(傅秉常). 1937년 칭다오(靑島). [사진 김명호] 수천 년간, 중국은 황제 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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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의 풍운아·괴짜들 구름 행렬 … ‘황푸군관’은 양산박
황푸군관학교 교장 시절의 장제스. 오른쪽은 랴오중카이가 사망한 이후 군관학교 당 대표를 계승한 왕징웨이(汪精衛). [사진 김명호] 1924년 봄, 잡지 ‘신청년(新靑年)’에 황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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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다리 잃었지만 한국 자유 지켜 … 후회 없다
윌리엄 웨버 전 미군 대령이 워싱턴의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비 옆 19인 용사상 앞에 서 있다. 용사상의 정가운데 인물이 웨버 전 대령이다. [워싱턴=채병건 특파원] 미국 워싱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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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타도” 외친 국민당, 레닌 스타일 따라 당 건설
소련에서 귀국한 장제스(왼쪽 둘째)는 쑨원(왼쪽 셋째)과 한 차례 기싸움을 치른 후 황푸군관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1924년 6월 16일 황푸군관학교 입학식. [사진 김명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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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을 가다 ①
3일은 중국의 ‘항일전쟁승리기념일’이다. 우리의 광복절이다. 69주년을 맞은 올해 중국은 이날을 법정국가기념일로 격상했다. 지난 2월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는 9월3일을 중국인민항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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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 명령 따른 장쉐량 ‘매국노’ 오명 쓰고 해외 유랑
장제스의 처남 쑹즈원(宋子文. 왼쪽 두 번째)은 장쉐량의 지기(知己)였다. 장쉐량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쑹즈원의 도움을 받았다. 결국은 장쉐량 문제로 장제스와 결별했다. 194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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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 명령 따른 장쉐량 ‘매국노’ 오명 쓰고 해외 유랑
장제스의 처남 쑹즈원(宋子文. 왼쪽 두 번째)은 장쉐량의 지기(知己)였다. 장쉐량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쑹즈원의 도움을 받았다. 결국은 장쉐량 문제로 장제스와 결별했다.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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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상철의 중국읽기] 중국은 '깨지기 쉬운' 나라인가
◆둔필승총(鈍筆勝聰)이란 말이 있다. 무딘 붓이 총명함보다 낫다는 이야기다. 책을 보고 며칠 지나면 알갱이는 흩어지고 잔상(殘像)만 남는다. 그래서 몇 자 옮겨 적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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情으로 쓴 ‘3通’ 제안문 … 탄원루이, 양안 화해 초석 깔다
타이완 동포에게 보내는 편지(告臺灣同胞書)를 의결한 전인대 3중전회 개회식. 앞줄 왼쪽부터 왕둥싱(汪東興), 덩샤오핑(鄧小平), 화궈펑(華國鋒), 예젠잉(葉劍英), 리셴넨(李先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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情으로 쓴 ‘3通’ 제안문 … 탄원루이, 양안 화해 초석 깔다
타이완 동포에게 보내는 편지(告臺灣同胞書)를 의결한 전인대 3중전회 개회식. 앞줄 왼쪽부터 왕둥싱(汪東興), 덩샤오핑(鄧小平), 화궈펑(華國鋒), 예젠잉(葉劍英), 리셴넨(李先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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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 천하’ 눈앞에 … 18개월 암투 막 내리다
실권 장악 후, 당·정 대표단을 이끌고 북한을 방문한 덩샤오핑. 1978년 9월 11일, 평양 모란봉. [사진 김명호] 덩샤오핑은 타협의 명수였지만, 당 주석 화궈펑이 왕둥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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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궈펑 개인숭배에 민심 변화 “덩샤오핑은 억울”
1982년 9월 중순, 중공 제11기 1중전회에 참석한 1세대 혁명가들. 마오쩌둥 사후 한결같이 덩샤오핑의 복직을 주장했다. 앞줄 왼쪽부터 쉬샹첸, 천윈, 예젠잉, 덩샤오핑, 리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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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궈펑 개인숭배에 민심 변화 “덩샤오핑은 억울”
1982년 9월 중순, 중공 제11기 1중전회에 참석한 1세대 혁명가들. 마오쩌둥 사후 한결같이 덩샤오핑의 복직을 주장했다. 앞줄 왼쪽부터 쉬샹첸, 천윈, 예젠잉, 덩샤오핑,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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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 화궈펑 눈치만 보다 ‘충성서약 편지’
1955년 7월, 남방 시찰 도중 후난성 간부들과 대화를 나누는 마오쩌둥. 화궈펑(왼쪽 첫째)은 마오의 고향인 샹탄(湘潭)현의 당 서기였던 관계로 참석했다. 이날 마오는 처음 만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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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 화궈펑 눈치만 보다 ‘충성서약 편지’
1955년 7월, 남방 시찰 도중 후난성 간부들과 대화를 나누는 마오쩌둥. 화궈펑(왼쪽 첫째)은 마오의 고향인 샹탄(湘潭)현의 당 서기였던 관계로 참석했다. 이날 마오는 처음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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毛 사망 90분 뒤 침실 옆방서 정치국 긴급회의
1979년 9월 18일 오후 3시, 천안문광장에서 열린 마오쩌둥의 추도식을 주재하는 화궈펑(왼쪽 둘째), 왕훙원(왼쪽 셋째), 예젠잉(왼쪽 첫째) 등 세 명의 부주석과 장춘차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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毛 사망 90분 뒤 침실 옆방서 정치국 긴급회의
1979년 9월 18일 오후 3시, 천안문광장에서 열린 마오쩌둥의 추도식을 주재하는 화궈펑(왼쪽 둘째), 왕훙원(왼쪽 셋째), 예젠잉(왼쪽 첫째) 등 세 명의 부주석과 장춘차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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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인방, 덩샤오핑·예젠잉 거세게 공격
예젠잉(왼쪽)은 덩샤오핑의 말이라면 뭐든지 경청했다. 저우언라이 사망 5개월 전인 1975년 8월, 인민대회당 만찬 당시 국방부장 예젠잉이 부총리로 복귀한 덩샤오핑의 말에 귀를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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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인방, 덩샤오핑·예젠잉 거세게 공격
예젠잉(왼쪽)은 덩샤오핑의 말이라면 뭐든지 경청했다. 저우언라이 사망 5개월 전인 1975년 8월, 인민대회당 만찬 당시 국방부장 예젠잉이 부총리로 복귀한 덩샤오핑의 말에 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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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 방광암 걸린 저우언라이 ‘대타’로 복귀
미국의 무인정찰기를 격추한 공군 부대원들을 격려하는 저우언라이(오른쪽 둘째)와 예젠잉(오른쪽 첫째). 1965년 1월 9일 베이징 인민대회당. [사진 김명호] 1971년 9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