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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와 이승만대통령
12월22일 금요일. 상오 10시30분에 대통령은 춘천전선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대통령은 「워커」장군의 2인승 비행기로 갔습니다. 「린치」대위가 조종했습니다. 춘천사람들은 대통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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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13)대일 강화조약체결-제80화 한일회담(12)
소련을 제외한 연합국의 대일강화조약체결은 한일회담개최의 촉매가 되었다. 우리가 미 국에 요청한 의견서의 일부채택을 미국이 한일 양정부에 통고한것은 조약 최종안이 발표되기 직전인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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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구→진해오가
8월17일. 대통령은 상오11시에 비행기편으로 부산으로 갔다가 하오 5시쯤 대구로 돌아왔다. 대통령이 공항에서 자동차를 타고 대구의 지사 사무실로 와보니 그곳엔 대부분의 각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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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프란체스카여사, 비망록 33년만에 처음 공개하다
대전으로 남하한뒤 대통령은 침실머리맡에 모젤권총 한자루를 놓고자는 습관이 생겼다. 나는 차디찬, 그리고 싸늘한 총구가 기분나빴다. 나의 이런 표정을 읽은 대통령은 『최후의 순간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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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원씨 별세
2대 국회사무총장·공보처장·세계통신 사장 등을 역임한 추강 이철원 박사(사진)가 8일 새벽 서울대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79세. 이 박사는 일제 때 조선어학회사건·흥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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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학련|나의 학생운동 이철승
47년 7월말 아침 학련본부위원장실인 나의 방으로 송원영 선전부장을 비롯, 전국 각도 계몽대장들이 들어섰다. 학련기를 앞세워 떠나는 학련계몽대였다. 그 명단은 ▲강원=송원영(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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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4)| 종로 YMCA의 항일 운동 (34)|전택부
흥사단과 동지회는 일정 때 민족 운동 사상 그 줄기의 산맥이었다. 하나는 안창호가 대표하고 하나는 이승만이 대표했다. 그런데 이것이 일제말기에 국내서는 수양동우회와 흥업구락부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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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4)(제자 윤석오)내가 아는 이 박사 경무대 사계 여록(121)
내가 이 박사를 모시고 국사를 도운 것은 49년 6월 2대 공보처장 때부터지만 그보다 훨씬 전부터 이 박사와 같이 일했다. 1938년 나는 미국 「컬럼비아」대학에 유학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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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8)(45)황규면
대통령을 모시고 간 사람은 이철원 공보처장, 나, 김장흥 총경과 경호원, 그리고 임시관저에 있던 김옥자씨 뿐이다. 여관에 따로 들었던 고재봉·김광섭 비서에게는 급하게 서두르는 통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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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 | 경무대 사계 (43)|황규면
임시 관저로 마련된 충남지사 관저에 들어가서야 우리는 식사를 들었다. 그리고 보니 아침·점심을 꼬박 굶은 채였다. 조금후 막 대전에 온 「무초」 미 대사가 대통령을 찾아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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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2) | 경무대 사계 (39)|고재봉
1950년으로 접어들어 북괴는 무력 남침 준비를 착착 진행, 한반도의 풍운은 급박해갔다. 그러나 미국이나 우리 정부의 정보는 어두웠다. 가끔 우리 육군 첩보 부대로부터 북괴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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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3)|가요계 이면사(24)|고복수
서민호가 빅터·레코드 연주단을 맡아 반도가극단으로 개편한 것은 1939년이었다. 이 반도가극단은 서민호를 단장으로 김도연(전 국회의원), 신윤국(일명 신현모), 김양수(증권거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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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6.25」20주…3천여의 증인회견. 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한국전쟁3년|「남」과 「북」의 형세⑧
① 이번 회부터는 6.25남침전의 한국형편과 이를 둘러싼 세계정세, 그 중에서도 특히 미국의 대한정책을 중점적으로 다루겠다. 북에서는 소련·북괴·중공이 그야말로 삼위일체가 되어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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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가장 길었던 3일|「6.25」20주…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다큐멘타리」한국동란 3년
각 신문·통신사가 사에 따라 다소의 시간의 차이는 있지만 사태의 위급함을 깨닫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26일 하오부터였다. 이에 따라 지면에도 이런 위기감이 간접적이나마 반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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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가장 길었던 3일(10)
북괴남침이 있은 후 이대통령이 직접국민에게 사태를 담화로 알린 것은 27일 밤 10시부터 서너번 되풀이된 KBS의 녹음방송이 처음이었다. 25일 상오 10시쯤 남침 제1보를 받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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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가장 길었던 3일(9)
26일부터 정훈국보도과가 본격적으로 방송국을 관장하고 모든 뉴스를 검열했다. 이철원(당시 공보처장·70)씨의 말을 들어보면 이선근 정훈국장은 이미 25일 상오 8시에 적침 첫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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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가장 길었던 3일(8)
1950년6월24일 저녁 중앙방송국에서도 파티가 있었다. 그러나 육본의 회관신축파티와는 달리 이 모임은 아주 오붓하고 조촐한 것이었다. 국방부정훈국장 이선근 대령(현 영남대학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