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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식이 부모사탕의 몇 분의 일 인들 갚을까"|계란 들고 아들집 가는 시골어머니

    분망한 아침시간이 자나고 오늘도 여느 때처럼 아기를 둘러 업고 저녁 시간에 대비해 여유 있게 시장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오늘따라 왜 그리 더운지 등에서 우리아기는 힘에 겨워 끙끙대

    중앙일보

    1981.09.12 00:00

  • 봄으로 가는 꽃가마-장형규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여든 해를 사시고도 허리하나 구부러지지 않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집안을 이끌어 가시더니 갑자기 돌아가신 것이다. 이미 죽음이 근접해서 그 죽음의 그림자를 만지

    중앙일보

    1981.01.01 00:00

  • 구속된 3장 6구 속에서 자유를…

    간밤에 무슨 기찬 꿈을 꾼 것도 아니고 아침은 또 언제나처럼 평범했는데, 이렇듯 큰 기쁨을 내가 누릴 줄이야! 당선을 알리는 전보의 그 눈부신 섬광 속에서 한동안 멍한 상태에 있었

    중앙일보

    1978.01.04 00:00

  • (1413)|전국학련(25)-나의 학생운동 이철승

    밤10시, 하늘엔 별이 빛나고 바다는 잔잔했다. 밀선을 타기로한 우리학병 60여명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약속된 장소로 갔다. 그러나 어떻게 알았는지 부둣가엔 수백명이 몰려들었다.

    중앙일보

    1975.08.13 00:00

  • (1409)|전국학연-나의 학생운동 이철승

    대문을 똑똑 두들겼다. 문을 열고 나온「가네다」(김전)내외가 친동생을 맞듯 우리를 반겼다. 창고에서 보급품을 몇 차례 빼준 후로 대접은 더욱 융숭했다. 오래지 않아 부대이동이 있

    중앙일보

    1975.08.08 00:00

  •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1399)|전국학련(11)나의 학생운동 이철승

    학병에 끌려간 뒤의 병영생활을 쓰기 전에 내 주변 얘기를 정리하고 넘어가야겠다. 나의 선대에는 굵직한 발자취를 남긴 분이 몇 분 있다. 시조인 이태사(이도)는 고려 태조인 왕건을

    중앙일보

    1975.07.28 00:00

  •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1390)|전국학련(2)나의 학생운동 이철승

    1944년 1월22일-. 겨울밤의 대한해협은 찼다. 영도쪽에서 흘러나온 등불이 가물거릴 뿐 부산항을 뒤로할 수록 파도는 거세어 갔다. 공습을 피해 어둠을 타고 배에 올라탄 조선인

    중앙일보

    1975.07.16 00:00

  • 농촌의 퇴근시간

    분주한 날들이다. 오뉴월 한철에는 귀신도 함께 움직인다고 할만큼 정말 눈코뜰새 없는 날들이다. 오늘도 아침 일찍부터 10명이 한조가 되어 시간 가는줄 모르고 모를 심었다. 10여일

    중앙일보

    1975.07.14 00:00

  • |신경림

    최근의 우리사회의 도덕적·문화적 타락의 제 양상은 자못 우리를 실망시키고 있다. 마침내 사회과학자들이 창조적 탐구를 포기하고 현실에 대한 사후적 축조승인에 허둥대도, 예술가들이 현

    중앙일보

    1973.09.11 00:00

  • (17)임진록|홍재휴 교수(대구교대) 교주

    삼등 고을(평양 동쪽 강동군)에 가니 원은 평양에 가고 비어 있었다. 하인에게 물으니 아버님이 신장(이여송)과 함께 평양에 계신다 했다. 평양으로 가며 먼저 아버님께 사람을 보내었

    중앙일보

    1973.03.27 00:00

  • 서애 유성룡의 아들 유진의 난중 체험기 임진록(16)|홍재휴 교수(대구교대) 교주

    누님이 버선을 잃을까 자못 걱정하시더니 다시 기워 주고자 하되 무명이 없으므로 누런 석새베(삼승포)로 만들어 주었는데 한발은 누렇고 한발은 희었다. 가평원 최덕순이라 하는 사람이

    중앙일보

    1973.03.23 00:00

  • 임진록 서당 유성용의 아들 유진의 유중체취기

    기신댁의 말에 실었던 짐은 다 누님의 값진 비단옷이었다. 그 일부를 맡아 쌀을 장만하였다가 우리들에게 밥을 지어 주었다. 이진사 (매형)가 밥을 재촉하여 먹고 말에 짐을 싣고 기신

    중앙일보

    1973.03.21 00:00

  • (4)서애 유성용의 아들 유진의 난중 체험기

    이튿날 일행은 영평(경기도 포천군 영중면·동면 일대)으로 갔다. 그때 할머님은 현등사에 평안히 계셨고 조종에 왜가 있다는 말도 뜬 소문이었다. 그것은 가평원이 거짓 공적을 올리려

    중앙일보

    1973.03.08 00:00

  • (3)

    대엿새후였다. 이진사와 함께 집앞 추자나무 밑에 앉아있는데 남쪽 산골짜기로부터 갓도 벗고 신도 벗은 사람이 팔을 걷어붙이고 달려와 그 앞을 지나가는 것이었다. 하도 괴이하여 그를

    중앙일보

    1973.03.07 00:00

  • (2)

    그 이튿날 낮 후에 아주버님(백부)께서 할머님을 모시고 동대문 밖 궁으로 나가셨다. 그 궁은 외조상 광평대군이 계시던 집이라 오촌 족장이 충의를 지키고 계셨다. 새 어머니도 우리

    중앙일보

    1973.03.06 00:00

  • (1)

    임신왜란 당시의 생생한 피난기록인 유진의「임진록」은 상주읍에사는 후손유시완씨가 간수해온 수단본으로, 중앙일보는 지난1월27일 이를 소개한바 있다. 수암 유진은 선조조의 영상 서애

    중앙일보

    1973.03.05 00:00

  • 할머님들 나들이

    서울YWCA는 28일 상오10시∼하오4시 소사의 버들 캠프에서 『할머님들의 나들이』를 갖는다. 게임과 노래, 포크·댄스로 꾸며진 이날 소풍의 참가비는 1천원.

    중앙일보

    1971.10.25 00:00

  • (17)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그때 일제는 임시 대본영 (전쟁을 총 지휘하는 곳)이 있는 히로시마 (광도)로 이우공을 보내기로 하고 이미 전임 발령까지 내렸으나 이우공은 이 핑계 저 핑계로 부임을 연기하고 있었

    중앙일보

    1970.05.26 00:00

  • 신문주간특집|신문에 한마디

    신문없이 지내던 시절을 나는 지금도 가끔 상기할때가 있다. 한집에 몇 가구가 살고 있었기 때문에 집에오는 신문은 항렬차례로 읽혔다. 할머님 아버님 남편과 시동생들, 그리고 내 차례

    중앙일보

    1968.04.06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