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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 되찾는 일에 남은 삶 바칠 것”
이해경 여사(80·사진)를 보는 순간 과거 사진 속에서 봤던 고종의 얼굴이 떠올랐다면 지나친 선입견이었을까. 이 여사는 고종 황제의 손녀다. 정확히는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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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家 를 찾아서] 천안 목천읍 동리 이동녕家
지난 2월 천안 목천읍 동리 석오 이동녕 선생 생가 앞에 ‘이동녕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선생의 손자 이석희 전 대우그룹부회장(왼쪽)과 증손자 이용순씨가 기념관을 둘러보며 담소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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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오늘] 서양의학 배우는 ‘학생’으로 격하된 식민지 한의사들
대한제국 시기의 한의원. 1882년 혜민서 혁파를 계기로 국가에 의한 한의학 교육은 사실상 폐지되었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의료 개입이 본격화하자 한의학 교육 기관으로 동제학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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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눈의 어의에게 고종은 비단옷을 내렸다
한국 근대의학의 아버지 H N 알렌(1858~1932). 선교사이자 미국공사관 소속 의사였던 그는 1884년 갑신정변 당시 칼에 맞은 민영익을 외과수술로 살려냈다. 그 일을 계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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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남의 손에 몸을 맡길 때 외세는 조선 땅을 삼키고 있었다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서울 정동의 옛 러시아공사관 전망대 남쪽 창문을 통해 내려다본 서울시 모습. 덕수궁에서 남산에 이르는 시내가 한눈에 보인다. 내부의 벽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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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남의 손에 몸을 맡길 때 외세는 조선 땅을 삼키고 있었다
서울 정동의 옛 러시아공사관 전망대 남쪽 창문을 통해 내려다본 서울시 모습. 덕수궁에서 남산에 이르는 시내가 한눈에 보인다. 내부의 벽돌 교체 등 2년에 걸친 보수공사를 마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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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오늘] 대한제국 황제 위에 군림한 통감부 설치
일본 공사관이 폐쇄된 바로 다음 날인 1906년 2월 1일 문을 연 통감부 청사. 12개 주요 도시에는 지방관청을 감독하는 이사청(理事廳)이 세워져 식민지화의 기틀을 다졌다. 명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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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깨운 이방인들, 한국인의 혼이 되어 잠들다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서울 합정동 양화진(楊花津)은 한국의 개화기를 상징하는 ‘아이콘’이다. 그곳엔 절두산 성지와 선교사 묘역이 있다. 한국 땅에 신명(身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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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깨운 이방인들, 한국인의 혼이 되어 잠들다
눈 내린 서울 합정동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 자신의 조국보다 한국을 위해 헌신했던 143명의 선교사 등 400여 명이 잠들어 있다. 신동연 기자 관련기사 “한국인들은 하늘을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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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5달러에 강탈한 일본, 1분 뒤 10달러에 팔았다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1903년 당시 대한제국 주미 대사관의 모습(사진 1)은 10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사진 2). 당시 대사관의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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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태극기 당당한 1903년 대한제국 주미 대사관 … 사진 첫 공개
고종의 한이 서린 대한제국 주미 대사관(당시 이름은 공사관) 건물 내부 사진이 처음 공개됐다. 1903년에 찍은 이 두 장의 사진(①, ②)은 워싱턴역사협회(the Hist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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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중앙일보] 5달러에 강탈당한 '대한제국, 비운의 역사'
일본이 강탈한 대한제국 주미 공사관 12월 6일 TV중앙일보는 중앙SUNDAY만의 재미있고 알찬 뉴스로 꾸며집니다. 미국 백악관에서 자동차로 10여 분 달리면 빅토리아 양식으로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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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태극기 선명한, 1903년 대한제국 주미 대사관
관련기사 1910년 5달러에 강탈한 일본, 1분 뒤 10달러에 팔았다 고종의 한이 서린 ‘대한제국 주미 대사관(당시 이름은 공사관)’의 건물 내부 사진을 중앙SUNDAY가 입수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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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5달러에 강탈한 일본, 1분 뒤 10달러에 팔았다
1903년 당시 대한제국 주미 대사관의 모습(사진 1)은 10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사진 2). 당시 대사관의 내부는 샹들리에와 태극 문양 쿠션으로 우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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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오늘] “황궁 주변엔 2층 건물 안 된다” 대한제국의 ‘고도제한’ 지침
1900년께의 경운궁 대안문(현 덕수궁 대한문) 주변. 왼편 앞에 팔레호텔이, 뒤쪽으로 자국 국기를 내건 영국공사관과 러시아공사관 건물이 보인다. 경운궁의 규모가 훨씬 컸지만, 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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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읽기 BOOK] 지금 세 배 크기 ‘황제 궁궐’ 덕수궁의 굴욕
현재 조선호텔 자리에 있었던 대한제국 시대 원구단(오른쪽)과 황궁우.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원구단(환구단)은 천자·황제의 상징이다. 황궁우는 모든 신령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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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어빠진 高宗의 총신들 월미도를 일본에 팔아먹다
새로 임명한 각료의 인사청문회로 장안의 지면이 시끄러웠던 것이 오래지 않았다. 인사 때마다 공직자의 비리가 도마 위에 오른다. “그 시절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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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오늘] 제2차 아편전쟁, 베이징 조약 … 조선은 여전히 깊은 잠
1860년 10월 베이징조약 체결을 주도한 청국 공친왕(1832~98). 그는 이듬해 동치제(同治帝)를 즉위시키면서 권력을 손에 쥐었으며,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고 양무운동에 힘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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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박물관 1호 보물 (23) 테러 당한 고종, 이 스푼으로 독 검사했을까
고종이 사용한 은제 커피 스푼. 손잡이 부분에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이화문양이 새겨져있다. 고종황제는 커피 애호가로 유명했습니다. 그러나 위험한 취향이었다고 할 수 있죠. 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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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무력을 동원해 서명을 강요했소”
대한제국과 일본 간의 을사늑약(을사조약) 직후 최초로 조약이 국제법상 무효임을 주장하는 고종의 전문이 발견됐다. 추론 결과 조약이 체결된 1905년 11월17일부터 23일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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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무라 형제에 속아 소금 1천 섬 날려
한일병합 이후에도 김두원의 투쟁은 이어졌다. 일본 총리, 의회, 조선총독, 경시총감 등에게 매일같이 탄원서를 보냈고, 고관들을 쫓아다니며 소금 값을 돌려줄 것을 애원했다. 김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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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 한마디에 채광권 알렌에 넘어가
1895년 미국인 실업가 모스(J. R. Morse)는 평안북도 운산군 일대 금광 채굴권을 획득한다. 이후 운산금광은 매년 수백만원어치의 금을 토해내며, 동양 최대의 금광으로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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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오늘] 러시아 차르 흉내내려던 고종, 국민국가 수립 여망 저버리다
한 세기 전 시대적 과제는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막고 근대 국민국가를 세우는 것이었다. 1897년 10월부터 1910년 8월까지 약 13년간 존속한 대한제국 시기는 국민국가 수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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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독서 고수] 『대한제국 최후의 숨결』을 읽고
견문록을 읽는다는 것은 저자의 발자취를 따라서 시간을 나누고 공간을 겸하고 인물을 만나는 과정이다. 저자가 말머리를 잡은 마동이 되고 내가 말 위의 주인이 되어 순례자의 길을 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