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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기남’의 박희순, 불혹의 도전
“마흔, 영화의 첫 주연배우가 됐다. 연극 12년, 그리고 영화 입문 8여 년 만에 맡은 첫 번째 주인공. 하지만 난 아직 완성된 배우가 아니다. 나의 배우 인생은 완성된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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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화가 이철수의 미간
“내 미간을 자세히 보라. 일자 눈썹의 흔적이 남아 있다. 암울했던 젊은 시절, 일자 눈썹에다 인상마저 찌푸리고 살았으니 얼굴엔 늘 내 천(川) 자가 그려져 있었다. 그러다 웃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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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대수의 트라우마
“두 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를 노래한 것이 ‘행복의 나라로’와 ‘바람과 나’다. 이혼의 아픔은 ‘ONE DAY’로 그렸고, 지금 와이프의 알코올 중독을 치료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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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화의 분신
“내 음악 인생의 화두는 완벽이었다. 음표 하나라도 잘못하면 끝이라는 압박감으로 수십 년간 바이올린을 연주해 왔다. 2005년 손가락을 다쳤다. 완벽할 수 없기에 연주를 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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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인표의 남다른 발음
“처음 연기할 땐 무지하게 욕을 먹었습니다. 혀가 짧아 발음이 시원찮다느니, 목소리가 가늘다느니. 사실 제 구강 구조에 문제가 있는 건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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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작은’ 작곡가 조영수
“저는 손이 아주 조그맣습니다. 여태껏 저보다 손이 작은 남자를 본 적이 없습니다. 웬만한 여자 손 크기죠. 그래도 이 두 손으로 피아노를 치며 작곡을 합니다. 조그마한 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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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 배우’ 정성화의 눈물
“매년 ‘더 뮤지컬 어워즈’ 시상식에 수상 소감을 품고 참석을 했습니다. 매번 미끄러졌습니다. 여기가 한계인가도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무대 위에서 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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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열음의 손가락 메트로놈
“절대음감은 타고났다. 그런데 리듬감은 수준 미달이었다. 그래서 일상생활에서조차 리듬감을 익히는 연습을 해야만 했다. 밥을 먹으며, 책을 보며, 사람을 만나면서도 손가락 리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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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지일관’ 동양화가 박병춘
“난 동양화를 전공한 화가다. 적어도 이 사실이 십수 년 전엔 콤플렉스였다. 동양화보다 서양화를 더 우선시하는 게 세간의 시선. 하지만 수십 가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붓을 놓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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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개그 달인 김병만의 몸
“난 버스가 싫다. 만원 버스에서 여차하면 내 얼굴이 여자의 가슴에 묻히기 십상이다. 158.7㎝의 키 탓이다. 하지만 난 지금 ‘몸 개그의 달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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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건우의 반쪽
“우린 늘 함께합니다. 연주는 물론 연습, 녹음, 인터뷰 현장, 어디에도 붙어 다닙니다. 윤정희씨는 부부요 친구요 매니저입니다. 저의 모자람을 감싸고 채워주는 아내.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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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TRAIT ESSAY]시골의사 박경철의 미소
“제 아들, 좀 아픕니다. 태어날 때 의료사고가 있었습니다. 뇌성마비였습니다. 제가 명색이 의사인데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이놈이 아니었으면 아득바득 살아올 이유도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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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을 나온 ‘수탉’ 오성윤 감독
“오십 줄이 다 되어서야 입봉한 초보 감독이 내 타이틀이다. 어릴 적 나는 나름 서울대 미대 출신이니 맘먹는 대로 다 잘될 줄 알았다. 스스로에 대해 착각했었다. 잔재주 피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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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퀸’ 차지연
“뚱뚱하며 못생기고 독한 역할은 도맡아 했었죠. 예쁘게 보이려 눈을 키우고 코를 높이기도 했죠. 그래도 뚱뚱이 역이 주어지면 제대로 하려고 15㎏ 살찌운 적도 있어요. 무명배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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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일의 ‘눈물’
“명색이 영화배우로 살아왔잖아. 감정 몰입이 몸에 뱄으니 눈물 흘리는 연기야 쉽지. 그런데 연기가 아니라 떠올리면 절로 눈물이 나는 여인이 있었어. 내 아이까지 가졌었지. 짧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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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수 그리고 ‘사이보그’
“없이 살 땐 손님만 오면 싸웠어. 난 소주에 김치 한 접시면 좋은데, 그것이 여자로서 수치스럽다는 거야. 그래도 이 사람 매일 평균 이삼십 명분 밥을 해댔지. 많을 땐 팔십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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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TRAIT ESSAY]권혁재 기자의 '不-완벽 초상화'
"쪽팔리게 가수가 뭔 주름 자글자글 하냐는 성화가 많어. 보톡스를 권유하는 이도 있었지. 혹하데. 그런데 어느 날 객석의 관객이 보였어. 다들 나이를 먹은 게야. 객석의 관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