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고리 권력’ 리잔수, 시진핑도 반한 개혁행정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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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잔수

중국에 “황제보다 태감(太監·환관의 우두머리)이 더 무섭다”란 말이 있다. 최고 권력자를 옆에서 보필하는 측근이 더 세도를 부린다는 얘기다. 요즘 권력 세계도 크게 다르지 않다. ‘문고리 권력’이란 말이 그래서 나온다. ‘대내총관(對內總管·대내 업무 총책임자)’으로 불리는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판공청 주임이 바로 중국의 ‘문고리 권력’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청와대 비서실장과 경호실장을 합친 자리다. 여기에 정보 수집·문건 작성 등도 맡고 있어 그 권력은 하늘을 찌를 정도다. 당연히 최고 권력자(당 총서기)가 가장 신뢰하는 충신이 자리를 맡는다. 원자바오(溫家寶) 총리는 자오쯔양(趙紫陽) 총서기 시절에, ‘태자당의 관리인’으로 이름 높은 쩡칭훙(曾慶紅)은 장쩌민(江澤民) 총서기 시절 각각 문고리를 잡았었다.

 차기 권력자 시진핑(習近平)의 선택은 리잔수(栗戰書·62)였다. 그는 지난 9월 1일 중앙판공청 부주임에서 주임으로 승진했다. 쾌속 승진이었다. 그는 불과 한 달 반여 전(7월 18일) 구이저우(貴州)성 당서기에서 중앙판공청 부주임으로 자리를 옮겼었다. 베이징의 한 소식통은 “중앙판공청 부주임에서 주임으로 승진하는 데 가장 짧았던 원자바오도 1년 반이 걸렸다”며 “리 주임의 승진은 차기 지도차 시진핑이 그를 얼마나 신임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말했다.

 리잔수와 시진핑은 세 차례 인연을 맺었다. 허베이(河北)성 핑산(平山)현 출신인 그는 1983년 허베이사범대 야간반을 늦깎이로 졸업한 뒤 우지(無極)현 서기가 됐다. 당시 시진핑은 바로 옆 정딩(正定)현 서기였다. 둘은 당시 각종 회의에서 여러 차례 교류했다. 리는 이때 시진핑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98년 리잔수는 산시(陝西)성으로 근무지를 옮겼고, 2002년 시안(西安)시 서기를 역임했다. 산시성은 시진핑의 고향이자 부친 시중쉰(習仲勳)의 혁명 무대다. 시진핑이 문혁 당시 하방당했던 곳이기도 하다. 리잔수의 근무 성과는 시진핑에게 속속 전해졌다. 세 번째 인연은 지난해 이뤄졌다. 2011년 5월 8일부터 3박4일간 시진핑은 구이저우를 시찰했다. 당서기인 리잔수는 시진핑의 모든 일정을 동행했다. 당시 시진핑은 리잔수의 개혁사상과 실사구시 태도에 깊은 인상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리잔수는 ‘하이브리드’형 정치인이다. 중국 권력의 양대 파벌인 공청단과 태자당 측과 원활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는 86년 허베이성 공청단 서기를 역임했다. 공청단파로 분류되는 이유다. 그런 한편으로는 ‘개전통지서(戰書)’란 뜻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혁명가 집안 출신이다. 국공내전 중 숙부 리정퉁(栗政通)이 산시성에서 전사했다.

리잔수의 또 다른 후견인은 쩡칭훙이다. 그의 누이동생 쩡하이성(曾海生)이 리잔수의 삼촌인 리장장(栗江江)과 위잉(育英)소학교 동창이었다. 시진핑이 리잔수를 선택한 것도 공청단·상하이방·태자당 등을 모두 아울러 권력 이양기를 안정적으로 관리할 적임자라는 점 때문인 것으로 알려진다.

 리 주임은 시인이기도 하다. “대장부 말고삐 잡고 집 떠나 만리요, 지사가 시를 읊으니 눈물이 천 길이네(兒男縱馬家萬里, 志士吟詩淚千行).” 2004년 추석 하얼빈 쑹화(松花)강 변에서 지은 ‘강변에서 고향을 생각하네(江畔思鄕)’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그는 시안시 당서기로 재직하던 2003년 투자 유치차 한국에 왔다. 당시 그는 “한국의 도전정신과 창의성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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